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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14절-26절, 예수님께만 닿아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9장 1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에는, 죽을 딸을 살리시고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신 능력의 예수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딸까지 살리실 것이라는 아버지의 믿음과 예수님께만 닿아도 나을 것이라는 여인의 믿음에 대한 강해와 주석입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26절, 예수님께만 닿아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9장 14절-26절, 예수님께만 닿아도


14절, 강해 주석 해설


그 때에(토테)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서 마태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여기서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눅 5:33). 아마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한편 이 당시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된 상태였는데(4:12),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수했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아마 이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인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들 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눅 18:12).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다.


당신의 제자들은 … 아니하나이까

이 질문은 아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으로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단히 슬퍼하는 중에 있으면서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이란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15절, 강해 주석 해설


혼인집 손님들이[헬,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금식 문제로 논쟁을 하고 계셨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유대교의 낡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가 필요함을 역설하신다.

첫째는 본 절의 혼인집 손님과 신랑의 비유이다. 예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혼인집 손님들이란 결혼식을 돕고 진행하는 신랑의 친구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결혼 주간에는 금식을 면제받았다. 즐거운 결혼 주간에 애통하는 금식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있는 동안은 금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많은 애통과 금식이 있을 것이었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사 54:5, 6, 62:4, 5, 호 2:16-20),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도래 또는 메시아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메시아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아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신랑을 빼앗길 날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 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 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다.



16절, 강해 주석 해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 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눅 5:36).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은 한 번도 세탁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전통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전통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7절, 강해 주석 해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 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 번째 예화는 두 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쉬이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리석게도 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두 번째의 ‘새’(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16:18, 18:17).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인 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



18절, 강해 주석 해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막 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한 관리가 와서

여기서 ‘관리’(아르콘)는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다(synagogue)에는 몇 사람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막 5:22, 눅 8:41 참조).


절하고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셔서 … 손을 얹으소서.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출 29:1-37 강해, ‘안수에 대하여’ 참조).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살겠나이다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절, 강해 주석 해설


일어나 따라 가시매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도 무릎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은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20절, 강해 주석 해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 라는 감탄사가 본 절의 앞 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레 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였졌던 차에”(막 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런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뒤로 와서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여기서 ‘겉옷 가’(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술’(tassel)로서,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 이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킨다(민 15:37, 신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민 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술’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21절, 강해 주석 해설


그 겉옷만 만져도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예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반드시 실제적으로 접촉을 해야만이 나을 수 있다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을 받겠다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받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22절, 강해 주석 해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 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딸아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안심하라(다르세이)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행 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여인이 왼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주술적 방법)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가 말씀 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막 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23절, 강해 주석 해설


피리 부는 자들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계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렘 48:36). 그리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훤화하는 무리

여기서 ‘훤화하는’(도뤼부메논)이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는 점을 암시한다(행 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故人)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 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흔재(痕在)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4절, 강해 주석 해설


물러가라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썬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던 것이다(요 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단 12:2, 요 11:11, 고전 15:6, 18).


저들이 비웃더라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불며 곡하기 위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비웃더라’(카테겔론)는 말은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한 번의 조소(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25절, 강해 주석 해설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들었다기 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붙이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막 5:40).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일어나는지라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으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26절, 강해 주석 해설


그 소문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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