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10장 16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희생과 고난이 필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제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23절,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
16절, 강해 주석 해설
보라(이두)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원문에는 ‘나’(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양을 이리 가운데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먼저 ‘순결하라’(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과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17절, 강해 주석 해설
사람들을 삼가라
먼저 ‘삼가라’(프로세케테)란 말은 ‘ … 로부터 떨어져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불필요하게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가지 말고 분별력과 지혜를 적절히 활용하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이란 불신자(Calvin, Weiss) 또는 적극적인 박해자(Bruce)를 가리킨다(33절).
저희가 … 공회에
‘공회’를 뜻하는 원어 ‘쉬네드리아’은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 ‘쉬네드리온’ 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본문의 ‘공회’는 지방의회들(local councils)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당시 이 지방 의회들은 공공 질서와 치안(治安) 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신 16:18). 따라서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지방 의회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저희’란 말은 ‘공회’란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동족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저희 회당에서
어떤 이들은 ‘저희 회당’이란 말 속에는 교회와 회당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훗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시작된 뒤 마태에 의해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저희’란 말은 비난의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것인 까닭에 이것 역시 이 구절이 훗날 삽입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참 신앙을 버린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해서 비난의 어감이 담긴 ‘저희’란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특히 마태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예수 또는 본서 기자인 마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역과 진리 거부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용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채찍질 하리라
채찍질이란 것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체형(體刑)의 일부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채찍질의 수가 40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5:1-3). 이 같은 체형을 선고 받은 죄수는 재판관이 보는 앞에서 땅 바닥에 엎드려 누워야 했고 그런 다음 그의 등에 채찍질이 가하여졌다. 채찍질을 가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매는 회초리와 같은 막대기였는데 그후에는 막대기에 가죽끈이 부착된 도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채찍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가죽끈에다 쇠조각 같은 것을 박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기에 가죽끈을 세줄로 달아 놓고 한 번에 세 대의 채찍질로 계산하여, 13번 때려 도합 39번의 채찍질로서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고후 11:24). 한편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처벌이 넓은 의미의 구타(beating)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채찍질(flogging)인 것을 볼 때,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협적 핍박은 동족의 비난이나 폭력보다 사법적 절차에 이해 내려지는 형벌이 더욱 컸던 것 같다(Hare). 여하튼 회당에서 회당 회원들이 채찍질하는 것이 빈번했음을 잘 알고 계셨던(23:34, 행 22:19, 고후 11:24, 25) 예수는 교회가 조성(助成)되어 회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이 채찍질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18절, 강해 주석 해설
총독들과 임금들
여기서 총독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등급에 위치한 통치자들이나 지방 행정 장관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갈리오(Gallio), 베스도(Festus), 가리사랴의 벧릭스(행 23:26)나 데살로니가의 읍장(행 17:6)등과 같은 이들을 생각할 수 있고, 왕들이란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들인 분봉왕(행 12, 1)이나 로마제국의 비호(庇護) 아래 있는 지방 토호(yeoman) 세력들 및 로마 황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17절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세속의 통치자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표현들을 통해서 제자들이 세상 법정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복음이 갈릴리 지역과 유대 민족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이와 비례해서 이들에 대한 반대 세력들 역시 그만큼 증가할 것이란 점도 예상할 수 있다.
끌려가리니
예수께서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 그의 예언에 따라 베드로는 네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것으로 보이며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앞에,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다른 임금들 앞에 끌려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것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 사역자들을 끌고 간 총독과 임금들로 보아야겠다. 여기서도 다시 암시되어 있다시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리란 것이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증거가 되게
제자들은 동족들의 교권주의적, 문화적 핍박과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통해 복음, 즉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와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폭발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순교는 곧 복음의 위대성과 진리의 무한한 생명력을 확증해 주는 최고, 최선의 증표(證票)가 될 것이다.
19절, 강해 주석 해설
넘겨 줄 때에
넘겨 주는 주체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즉 훗날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곳곳에 전파했을 때 이 복음을 가장 방해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의해 제자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어떻게 …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와 불안 등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치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즉 미리 앞서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근심어린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에 위선과 허위의 탈을 덧씌우는 위험성을 낳게 한다. 따라서 답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인 동시에 본인으로서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일이된다.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처럼 그 염려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6:25).
그 때에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in that same, KJV)이다. 이는 결국 인간편에서 준비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의 대변자되신 성령께서 모든 답변 준비를 완벽히 해두고 계셨음을 암시해 준다.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이는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가장 시기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서민 출신으로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고 또 위풍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의 세련된 관리나 총독 또는 임금 앞에 섰을 경우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대단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20절, 강해 주석 해설
너희가 아니라
이 말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이성적 판단 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복음의 변증(辨證)과 신앙의 순수를 보존하는 일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고별 강화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 사역을 진척시켜 나가게 되리라고 에언하셨던 바가 있다. 그러나 고별 강화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은 주의 제자 당대에만 적용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은 고별 강화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현저하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순절 이후에 행해질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오순절 이전 주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행하심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그들의 처지를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로 복음 사역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이는 성령의 인격성과 사도적 기록의 영감성을 대변해 주는 구절이다. 실로 성령께서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통해 복음 증거자들의 내면에 인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충만한 영감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요 15:26, 27).
너희 아버지의 성령
예수께서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라고 지칭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녀로서의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보호로 인해 그를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혈연 관게에 있고, 나를 조성(造成)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과 죄악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는 이는 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행 4:8, 13:9, 고후 13:3).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인격들 속에 영원히 안주(安住)하시며(요 14:16, 17), 또한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혜와 선한 변증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 역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즉 성부 하나님의 부권적 보호의 약속과 성자 하나님의 그 약속에의 보증 및 성령의 실제적 보호와 후원이 그것이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히 ‘성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 말이며, 성령의 호칭에는 이 외에 그리스도의 영(롬 8:9), 주의 영, 하나님의 신(사 11:2) 등이 있다.
21절, 강해 주석 해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제자들에게 미칠 박해의 양상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지경, 곧 혈연관계에서 조차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실로 종교와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족 상호간에 반목(反目)과 적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체험해온 바이다. 실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란 참 종교를 대적할 때는 모든 인륜의 사슬을 끊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악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의 갈등 상황은 혈육으로 치장된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으로서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죽게 하리라
유대 묵시 문학에는(4 Ezra5:9, Jub23:19, 2 Baruch 70:3) 말세에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란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들이 흔히 발견된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아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 6)고 예언하였다. 한편 미가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는 예수의 이 예언은 실제로 네로와 같은 로마의 폭군하에서 복음을 믿는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과 신자들은 화형(火刑)을 당하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혈연보다는 영적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혈연이 절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악의에 차서 복음을 핍박하는 가족들의 만류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켰던 것이다.
22절, 강해 주석 해설
내 이름을 인하여(디아 토 오노마 무)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벧전 4:14), 또는 ‘그리스도로 인해’(5:10-12)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 제자들이 세상 관원(官員)과 자기 가족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분의 삶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배척받은 데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이 같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 개인의 실수로 인한 고난과는 구별된다.
모든 사람에게
여기의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all men without distinction), 곧 인종, 피부색,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는 좀더 축소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이란 박해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제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이란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부패된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인간은 어느 위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모두다 멸망치 않을 수없는 것이며(롬 3:10) 또 그렇기 때문에 의(justice)를 향하여서는 부패한 본성에 따라 분노와 적의를 품는 것이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
여기서 ‘나중’이란 말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즉 길든 짧든 간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는 인내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나중’이란 말은 다른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칼뱅(Calvin)은 이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때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을(Clarke),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세상 끝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Beza, Weiss)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전체 문맥상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생명이 끝날 때까지, 또는 인내가 더 이상 요구될 필요가 없는 때까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께 충성하려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은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배교(背敎)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의심없이 믿는 행위이다(갈 6:9).
구원을 얻으리라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획득이 약속되었다(눅 21:19).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 생명의 잠정적 손실에 대한 전인격적 생명의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이다. 정녕 신앙인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상실케 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와 더불어 완전한 회복과 보존을 받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23절, 강해 주석 해설
박해하거든 … 피하라
이 말은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목적으로 합리적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권고이지만 이는 오히려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사려깊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미련한 아집과 우직한 자아(自我)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끝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주를 부인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주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소유된 자의 올바른 생사관(生死觀)이다(롬 14:7, 8).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전도를 마치기도 전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셨는가?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이 관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은 큰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동네에 다니는 것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급히 다가올 사건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있다.
첫 번째 해석은 “인자가 오리라”를 “인자가 너희들에게 오리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먼저 가서 일하고 있으면 예수께서 곧 뒤따라가 그들과 합류하겠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문맥에도 잘 맞지 않을뿐더러 신약에서 “인자가 오리라”는 말은 항상 종말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두 번째 해석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확실히 믿었다고 보는 것이다.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그렇게 해석하여 20세기의 종말론 논쟁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결국 예수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세 번째 해석은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을 재림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이 해석을 선호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에도 다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로 예루살렘의 멸망(A.D. 70년)이 올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인자의 오심으로 보는 것은 성경상 그 근거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인자가 직접 오셔서 예루살렘을 멸망하도록 하셨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채택하기 힘든 해석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이스라엘을 온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무렵에야 예수께서 오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24:14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역시 신약에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은 늘 구분되어 쓰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난점이 있다.
네 번째 해석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이 세상으로 해석하여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가지고 다 다니기 전에 인자가 온다고 설명하거나 혹은 너희들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을 만큼 핍박이 극심하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인데 설득력이 약하다.
제일 성경적인 해석은 “인자가 온다”는 말씀을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왕국은 이미 세상에 임하였다. 예수는 마태복음 16:28에 10:23과 평행되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여기서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공관복음에서 이 구절 다음에는 다 똑같이 변화산 사건의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은 변화산 사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왕국 그 자체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이미 임재 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자의 오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하나님 왕국, 즉 은혜의 왕국의 도래로 이해할 수 있다.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