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마태복음 12장 38절-50절, 새로운 가족관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2장 38절부터 50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에 요나의 표적을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가족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8절-50절, 새로운 가족관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2장 38절-50절, 새로운 가족관계



38절, 강해 주석 해설


그 때에 … 말하되

여기서 ‘말하되’의 원어 ‘아페크리데산’은 ‘대답했다’는 뜻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표적 보여 주시기를

여기 ‘표적’(세메이온)이란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통해 초자연적인 사실이나 진리를 나타내 주거나 어떤 예언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증거로써 즉시 또한 신속하게 발생되는 어떤 증표(somemiraculous token)를 의미한다. 이들이 요구하는 눈에 뵈는 표적은 적들의 메시아 상(像) 에 근거한 이적적 사건, 즛 예수께서 로마에 물리치시고 다윗의 통일왕국을 건설하는 것, 또는 천군천사의 대군을 몰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서 그들의 정치,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것 등이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아 상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만이 발생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춘분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모든 것을 바알세불의 영향력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의 이 표적(sign) 요구는 뻔뻔스럽고도 무례한 것으로서 자신들의 악의에 찬 불신앙적 내면을 여실히 내보인 것이었다.



39절, 강해 주석 해설


악하고 음란한 세대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불충실하기 때문에 음란하다고 정의하셨다. 이는 렘 3:6-13, 겔 16, 호 1:2-2:15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결혼으로 결속한 부부와 같은 관계이므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우상숭배 행위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간음(adultery)으로 인식됨을 의미한다. 이 영적 간음은 유대인들이 그동안 범한 우상숭배 행위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렘 3:10), 하나님을 향한 내적 적개심(호 7:13-16), 세상과 벗을 삼는 것(약 4:4) 등등으로부터 예수가 제시한 구원의 길을 버리고 다른 것을 좇는 불경건 및 예수의 사랑과 은혜의 표적을 경멸하고 자신들의 기준에 적합한 표적을 요구하는 등의 불신앙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으로부터 불충실한 위선적 행위 전반을 내포한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요나의 표적(the sign of Jonah)이란 말은 요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요나에 의해서 주어진 어떤 표적을 말하지 않는다(Zerwick, Turner). 요나는 일종의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니드웨 사람들 앞에 나타났으므로 요나 자신이 그들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Jermias, E.H. Merill).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구원 받은 것같이 예수도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사흘동안 그의 시체가 무덤에 안장(安葬)되었다가 제 3일에 부활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수가 어떤 표적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메시아이시며 메시아의 표적이 된다고 함을 의미한다. 보충 설명은 눅 11:29의 주석을 참고하라.



40절, 강해 주석 해설


밤낮 사흘

이는 욘 1:1-2:10에 나오는 바다 속 경험과 예수 자신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사건을 비교하신 부분이다. 한편 본문의 ‘큰 물고기’(투 케투스)란 바다의 괴물 또는 거대한 불고기란 뜻으로, 이 물고기 배 속에서 구출된 요나의 경험은 곧 예수의 땅속 3일간의 묻힘과 그 3일후의 부활을 예시하는 예언적 모형이 된다. 그런데 예수의 목요일 수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W.G. Scroggie)은 ‘밤낮 사흘’을 문자적인 의미로 취급하여 목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만 72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수난 주간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보고(26:17-30)에 의하면 예수는 무덤속에 불과 36시간 남짓 있었던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본 절의 “밤낮 사흘은” 우리에게 하루 24시간씩 정확히 만 삼 일의 정확한 시간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저 삼 일이라고 강조하는 성경 기자에게는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성경 시대에 하루는 낮/빛과 밤/어둠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삼 일 낮과 삼 일 밤”은 삼 일을 말하는 다른 방식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마 4:2) 금식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가는 “사십 일”(막 1:13)이라고 말한다. 성경 기자들은 정확한 24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거기 있지 않았다. 우리처럼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구절은 동의어이고 첫 번째는 시간상의 정확한 분량이 아닌 날 수를 강조한다.


다른 구절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다른 시간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중 몇몇은 서로 모순처럼 보인다. “삼 일 만에(또는 ‘후에’) 살아나리라”(막 9:31, 10:34, 마 27:63 참조)에서는 ‘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meta)’를 사용했다. “사흘에”(마 27:40)에서 ‘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위에(on), 안에(in)’를 뜻하는 전치사 ‘엔(en)’이다. 전치사를 사용하지 않은 구절도 있다(마 16:21, 17:23, 20:19, 눅 9:22, 18:33, 고전 15:4 참조). 그리고 “사흘 동안에(사흘에)”(마 26:61)라는 표현에 사용한 전치사 ‘디아(dia)’는 ‘삼 일 안에’, ‘삼 일 이내에’, ‘삼 일 사이에’(호 6:2 참조)로 번역될 수 있다. ‘후에’라는 표현은 부활이 넷째 날에 발생했음을 암시하지만 다른 구절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결국 ‘후에(메타)’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관건이다.

유대 문헌에서 ‘삼 일 후에’라는 구절은 ‘모레’를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했다. 마태복음 27장 63절에 따르면,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분이 셋째 날에 부활할 것이므로 “그 무덤을 사흘까지(‘헤오스’ heos) 굳게 지키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삼 일 후에’는 셋째 날의 어느 시간을 말하며 ‘셋째 날’과 같은 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사흘을 ‘삼 일 밤낮’으로 말한 곳은 12장 40절뿐이다. 즉, 당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삼 일 이내에’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포함 계산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면 ‘삼 일’이라는 관용적 문구에서는 하루의 일부분도 온전한 하루로 계산한다. 관용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구약에서도 유사한 용례가 나타난다. ‘삼 일 밤낮’이라는 구절은 ‘삼 일’을 의미한다(삼상 30:12, 13). 에스더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함께 ‘삼 일 밤낮’을 함께 금식하자고 요청했다(에 4:16). 그런 다음 “제삼 일에” 그녀는 왕 앞에 나왔다(에 5:1). 이것이 포함 계산이다. ‘삼 일’에서는 하루의 일부도 온전한 하루로 계산하여 포함시킨다. 르호보암 왕은 사람들에게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왕상 12:5, 12)고 요청했다. 이스라엘 밖에서도 동일한 현상을 발견한다. 기원전 8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왕은 자신이 어느 도시에 당도한 사건을 언급했다. “짐은 아즐라야누 시에서 삼 일 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셋째 날에 그들이 도착했다.” 첫날의 한 부분, 셋째 날의 한 부분도 삼 일에 계수 되었다.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성경 기자들이 계산한 방식으로 날을 계수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셨고 셋째 날에 부활하셨다.


땅 속에(엔 테 카르 디아 테스 게스)

문자적으로 ‘땅의 심장에’로서, 욘 2:2의 ‘스올의 뱃속’이 문자적으로 ‘음부의 심장으로부터’란 뜻이므로 아마 이 표현 양식을 따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 ‘땅의 심장에’라는 표현은 예수가 지옥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의미(Meyer)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시체가 땅 속 무덤에 안치(安置)될 것을 의미한다.



41절, 강해 주석 해설


심판 때에 니드웨 사람들이 … 정죄하리니

요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라면, 요나의 절도로 회개의 자리에 섰던 니드웨 사람들은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요나와 예수 모두는 죽음에서 구원받음으로써 자신들이 전파한 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하였으나 그들의 전도를 받은 대상자의 반응은 서로 정반대의 것이었다. 즉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드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으나(욘 3:1-10),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이신(요나는 심판과 복음을 선포하는 자, 예수는 심판자요, 그 선포의 대상자이셨다. 그리고 요나는 친히 세상 죄를 지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을 마련하셨다<5:21ff, 12:6ff>. 예수의 전도와 이적을 보고서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심판 날에 하나님은 니드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입증된 이 세대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일어나서 증거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여기서 ‘심판 때에 일어난다’는 것은, 곧 심판 법정의 증인으로서(욥 16:8)최후 심판 때에 이 세대의 잘못을 송사(頌辭)한다는 의미로서 셈어의 법률에 관한 관용적 표현이다(Black, Wellhausen).



42절, 강해 주석 해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남방(아라비아 반도)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루살레미로 왔다(왕상 10:1-13). 왕상 10:1에 의하면 본문의 ‘남방’을 구체적으로 ‘스바’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곳 ‘스바’는 유대인들이 ‘땅끝으로’(at the ends of the earth, 렘 6:20) 알고 있던 아라비아 남서부의 한 왕국이었으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에디오피아의 여왕이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VIII, 165). 여하튼 남방 여왕은 열정적인 탐구열을 가지고 ‘땅끝에서’, 곧 아주 멀고 먼 이스라엘 밖으로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왔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그들과 함께 계시는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교만과 율법적 허영에 가득찬 나머지 귀기울이지 않고 그의 거부함으로써 마지막 날에 남방 여왕으로부터 송사당할 것이다. 한편 예수는 자신이 솔로몬보다 극히 탁월한 존재임으로 선포하셨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진리이다. 즉 예수는 신.구약을 통틀어 모든 지혜자, 예언자보다 또한 모든 지혜 문학보다 더 큰 감회와 영향을 온 세상에 미쳤다. 그리하여 솔로몬이 단지 진리를 간파(看破)할 줄 아는 한 여왕을 이끄는 것이 큰 화재가 되었던 반면 예수는 빈부귀천을 망라(網羅)한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이끄셨던 것이다(요 12:32).



43절, 강해 주석 해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이 어구는 22-37절의 바알세불 논쟁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 많은 학자들은 눅 11:24-26의 평행본문 가운데서의 이 비유는 개인에게, 마태복음에서는 나라(nation)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본문을 두 가지 측면으로 분리해 볼 수 있는데, (1)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학사 에스라와 느헤미야 등 선지자들에 의해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 종교혼합주의, 잡혼(mixed marriage) 등의 불결한 모든 관습을 제거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은 더러운 영이 이스라엘에게서 나간 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2)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식과 바리새주의에 신음하던 유대민족이 예수의 복음 사역(귀신을 쫓아내는 치유, 이적에 비교), 곧 바알세불 논쟁과 요나의 표적, 강한 자가 집에 들어가 귀신을 축출하는 기사 등을 전해 듣고 예수에게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던 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나 사막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귀신의 처소로 알려졌다(레 16:10, 사 13:21). 이와는 대조적으로 ‘물없는 곳’은 거주지가 없는 곳(욥 30:3, 시 107:4-7, 바룩서 4:35)이요 원기(元氣)를 회복할 수 없는 척박한 곳(시 63:1)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귀신은 인간의 마음 속에 거하며 그 인간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의 거처가 될 곳은 맑고 깨끗한 영혼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영혼, 진실과 불의의 중간에서 회색빛 태도를 취하는 영혼이다. 그곳을 찾기까지 그는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 찾아 헤맬 것이다.



44절, 강해 주석 해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헬라어 본문에서는 특히 ‘내 집으로’(에이스 톤 오이콘 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귀신은 전에 자기가 거하던 인격을 이렇게 부르면서 그곳이 여전히 자기의 소유임을 확신하고 있다. 적어도 귀신은 자신이 옛날 거했었던 그 인격의 본질적 특성이나 신앙, 의지적 특질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집이 비고 청소되고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로 쓸어 깨끗케 되고’이다. 이는 (1)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비록 이방의 우상 신상들을 파괴하였으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부재(不在)하고, 그들 종교는 형식에 치우쳐 있었음을 나타내며 (2) 영적으로는 예수의 전한 복음에 솔깃하기는 했으나 단지 예수에 대한 악의적 대항을 삼가하고 중립적 태도를 취했을 뿐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불의와 적극적 악의가 없는 상태를 경건하고 거룩한 상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Hendriksen). 오직 전적 헌신이냐 전적 부인(否認)이냐만 있을 뿐이다.


수리되었거늘[헬, 케코스메메논]

헬라어 동사 ‘코스메오’의 완료 수동분사로, 정확한 뜻은 ‘장식되어졌다’이다. 바벨론에서의 종교 혼합주의 등과 같은 더러운 악령의 영향력이 제거된 이스라엘이 (1) 주의 회복케 하시는 은혜에 의해 장식(裝飾)되었다고 보는 견해(De Wette, Chrysostom), (2) 또 다시 새로운 죄 또는 악령으로 장식되었다고 보는 견해(F.R. Fay. Origen), (3) 바리새파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과 위선 및 랍비들에 의한 율법주의로 장식되었다고 보는 견해(Alford)가 있다. 일반적으로 비고 소제되고, 수리된 집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알포드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율법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태도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참 정신이 가리워진 상태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본다. 한편 비고, 청소되고, 수리된 그 집은 악한 영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참된 영적 변화가 아직 발생되지 않은 상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율법 규정들에 대한 맹목적 추구와 열심으로 그의 영혼의 문제, 즉 영생과 구원의 열망을 이루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45절, 강해 주석 해설


더 악한 귀신 일곱

여기서 ‘귀신 일곱’이라는 말의 ‘일곱’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숫자로 완전한, 더 이상은 생각할 수 없는 정도의 양(quantity)과 질(quality)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곱 귀신이란 가장 강하고 악한 귀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역사적 측면에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the Great Alexander, B.C. 356-323) 왕의 침략과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타네스(Antiochos IV)에 의한 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Hellenize)를 상징할 수도 있다. 실로 안티오커스 4세는 페르시아 시대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보증되어 있던 종교상의 특권을 박탈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제의(祭儀)를 거행, 참여토록 하였다. 이 같은 사악한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서 안티오커스는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전락(轉落)시켰다고 한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비유에 대한 전체 결론으로 악한 세대로서의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저주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저들의 자랑이며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멸당했다.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가 쉬우리라”(10:15)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 그들의 형편은 전보다 더욱 더 비참해졌다.

또한 이 비유는 우리가 단지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탄의 세력에서 벗어났ㅏ면 즉시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 마음과 행동을 사로잡아야 한다. 단지 악을 피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확신과 적극적인 선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 악이 틈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할 때, 우리의 삶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활기와 생명이 넘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전보다 더 심한 영적 흑암이 우리에게 올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46절, 강해 주석 해설


예수께서 무리하게 말씀하실 때에

문자적으로 ‘예수께서 무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고 있는 동안’ 이다. 이는 앞 구절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집안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막 3:20, 21).


그 모친과 동생들

13:55-56에 의하면 예수에게는 모친 마리아와 그 형제들 야보고,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이 있었다. 여기 언급된 형제들은 같은 어머니에서 출생한 예수의 동생들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이나 초대교회 교부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마리아의 평생 처녀설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펼친다. 즉 로마 가톨릭은 ‘형제들’이 요셉의 전처(前妻)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들이거나(Hillary, Epiphanius) 아니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똑같은 이름을 지닌 동생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아들들이라는 견해이다(Lange, McHugh, Jerome, Lightfoot). 사실 ‘형제들’이란 남자 친척들이라는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행 22:1). 그러나 이런 광의적 의미에 근거하여 ‘형제들’을 전처 소생으로 본다면 예수는 법적 측면에서 다윗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름이 동일한 마리아의 여동생의 아들이라고도 볼 수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견해로서(Tertullian, Heggesipus) ‘형제들’은 예수의 친동생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한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훗날 예수가 최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무리에 함께 가담하여 예수의 처형장면을 지켜보았으며(요 19:25)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는 오순절 사건에 참여하였다(행 1:14). 또한 주의 형제 야보고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행 15:13, 21:18, 고전 15:7, 갈 1:19, 2:9, 12, 유 1:1).



47절, 강해 주석 해설


예수께 여짜오되 …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본 절은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등)과 역본들(시리아역, Vulgate역)에는 생략되어있기 때문에, 46절과 48절을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후대 필사자들이 의도적으로 첨가한 설명구로 보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본 절은 분명히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행구절(막 3:32, 눅 8:20)에서 그 타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적어도 원문(the Original Text)에는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D.A. Carson). 한편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한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예수가 전통적 권위를 지닌 바리새인들의 대적자(對適者 )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2) 예수의 발빠른 선교사역으로 인해 그의 건강상 어려움을 직감했기 때문에(막 3:21), (3)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의로의 이사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4:13, 눅 4:16-31, 요 2:12) 등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들은 수없이 운집한 무리들 때문에 예수와의 접촉이 심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눅 8:19).



48절, 강해 주석 해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존재, 즉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요 19:26, 27). 이 말은 출생과 유전(遺傳)으로 이뤄지는 혈연 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앙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보다 더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적 가족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노력으로 이 땅의 한 가정에 태어나 혈연 관계를 맺으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한 선언과 긴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바로 본문의 이 구절이 예수의 ‘로암미(Lo-Ammi) 선언’에 해당한다. 이미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개별적으로 영원히 선택된 각각의 인격들이라고 볼 수는 없듯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는 비록 혈연적 가족일지라도 예수가 선언하시는 하늘나라의 영적 가족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49절, 강해 주석 해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여기 손을 내뻗은 것은 예수의 애정어린 마음의 표현인(Hendriksen) 동시에 최대의 겸손(Bengel)이며 확신에 찬 행동 언어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몸짓과 더불어 자신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성(聖) 가족’이라는 영광스런 선언을 하셨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신앙으로 아뤄지는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한 아버지를 모신 동일한 가족의 일원이 됨을 보여주셨다. 비록 이들 중 나약한 본성에 의해 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를 향하여 가족됨을 선언하실 것이며, 그들을 내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 아니하실 것이다(롬 8:17, 29, 히 2:11).



50절, 강해 주석 해설


누구든지

이는 성(聖) 가족의 개방성과 포괄성 및 무한대성을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실로 성부 하나님을 중심하여 이뤄지는 영적 가족은 빈부의 차이나 지역, 문화, 사상 및 계급 간의 차이없이 그리고 영원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 이는 만유(all thing under the sun)의 주인이시요 만유보다 크신 분이 바로 이 가족의 친부(親父)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는 무조건적 개방성을 띤 것만은 아니다. 이에는 철저한 제한성과 배타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행함과 동참하는 자’라는 절대적 제한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이는 신령한 가족을 정의하는 말로 눅 8: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속(眷屬)이요(엡 2:19), 믿음의 식구들(갈 6:10)이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란 초자연적인 차원의 신비를 함축한 말로써 예수께서 절대적 존재자로서의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곧 부자(父子)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다’는 것은 어떤 의롭고도 선한 일을 몸소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계시된 그분의 구원 의지로서, 예수를 신앙하고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애쓰는 일을 의미한다(요 6: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