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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 9절-21절, 치유와 경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2장 9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계속해서 병자들를 고쳐 주십니다. 본문의 주석입니다.


마태복음 12장 9절-21절, 치유와 경계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2장 9절-21절, 치유와 경계



9절, 강해 주석 해설


거기를 떠나

‘떠나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메타바이노’의 일상적 의미는 ‘자리를 바꾸다’이지만 특별한 본문에서는 이야기를 화제나 그 이야기가 진행되던 장소와 시간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 5:24, 요일 3:14에서는 사마에서 생명으로 옮기웠음을 나타낼 때 이 ‘메타바이노’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평행구인 눅 6:6에 의하면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친 사건이 일어난 날은 밀밭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 바로 그 안식일과는 다른 인식일 날로 보고(report)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가 사용한 ‘메타바이노’란 말과 누가의 기록에 의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신 날이 같은 안식일이 아니라 또 다른 안식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공백과 장소 변경이 예수께서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되돌아가신 여정(旅程)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그레스웰). 물론 ‘메타바이노’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11:1, 15:29) 이미 ‘되어진 한 여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 요 7:3에서도 ‘여기를 떠나’의 뜻인 ‘메타베디 엔튜덴’이라고 하는 유사한 표현이 갈릴리에서 유다로 간 여행에 사용되고 있다. 여하튼 비록 이동된 장소가 과연 어디였는지 또 시간적으로 1-8절과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는지는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논쟁이 발생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저희 회당에 들어 가시니

본 장에서의 두 번째 사건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과 그에 따른 논쟁의 무대(setting)가 된 ‘저희 회당’이란 표현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A.D. 50-70년경) 이미 세워져 있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유대교 회당 간의 거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저들의 회당은 유대인들이 본격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 시대를 이루게 되었던 바벨론 포로기와 학사 에스라 통치 시기에 성전과 율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유대인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안에서 약 480여개의 회당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경우 그는 매일 회당을 방문하였으며,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 때에는 반드시 회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한편 유대교 회당은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이 최초의 설교와 말씀전파를 행하였던 선교의 매체(媒體)라고 하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행 9:20). 그런데 예수께서 ‘저희 회당’에 들어가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은 더욱 더 분명해 진다. 회당에 대한 좀더 풍부한 이해를 위해서는 죽 4:15-30의 주석, 주제 강해 ‘유대교 회당과 초대교회’를 참조하라.



10절, 강해 주석 해설


한편 손 마른 사람

이 사람은 뇌의 손상으로 인한 중풍이 아니라 피의 순환이 불순함으로 손의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왕상 13:4). 한편 눅 6:6에 의하면 마른 손은 더구나 오른 손이었다. 그리고 외경 가운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가 사용한 복음에서 제롬(Jerome)이 인용한 것(Wordsw. & White’s edition of the Vulgate, A.D. 383)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예수께 지신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 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랑케(Lange)에 의하면 이 사람은 우연히 그 회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의 대적자들에 의해, 주를 모함하고 송사하기 위한 ‘악의적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특별히 불려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 사회의 중심지로서, 결정짓거나 특정한 사실을 발표, 공표하거나, 서약을 행하거나, 재판을 행하거나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공적인 일을 위한 회합(會合) 장소였다. 즉 회당은 율법을 연구, 가르치는 학교와 기도의 처소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방 법정으로서의 역할까지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한 것은 곧 예수를 의식적으로 음해(陰害)할 목적으로 지방 법정에 고소하고자 한 것이 된다. 실로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를 고소할 증거와 명분을 찾아 기회만 있으면 그를 정식재판에 회부(reference)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한 저들의 이번 모략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직접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14절).


물어 가로되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송사할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그의 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울법을 연구하는 곳이며 기도처로서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회당 안에서 저들은 회당의 목적과는 반대로 악의에 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마태는 마가와 누가로 보고(막 3:1-6, 눅 6:6-11)와는 달리 바리새인들이 보다 진취적이고 공격적으로 손 마른 사람의 불행한 처지를 이용해 예수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가 먼저 그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갈채를 받게 되는 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의도에 의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침으로써 고의(故意)로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도 없고, 또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외면하심으로써 제사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당신의 지난번 가르침을 스스로 파기(破棄)할 수도 없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실로 저들은 예수를 위선적이고 편파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자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빠지게 만들려 이 같은 교묘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질문은 눅 14:3에서 예수가 저들에게 한 질문과 똑같다.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것이 자비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여세스티’, 즉 합법적(lawful, KJV)인가 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그들 조상의 유전에 의하면 만일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라면 안식일일지라도 의사는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Mishnah, Yomah 8:6, Mek Exod 22:2, 23:13). 그러나 문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경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경우, 즉 중풍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손에 힘이 없어지거나 손이 말라버린 상황은 그것이 결코 시각을 다투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위급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제기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A.D. 1C경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하는 율법에 대해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었다고 한다(Mishnah Eduyoh 2:5, M. Sabbath 6:3, Mek Exod 22:2, 23:13).



11절, 강해 주석 해설


양 한 마리 … 안식일에 …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이 논쟁은 눅 13:15, 14:5와 유사성이 있다. 비록 쿰란 공동체는 기껏해야 동물 스스로가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널판지를 넣어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더 적극적인 보호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일차적으로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그 웅덩이에서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주면 2차적으로는 그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사람이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Maimonides, Talmud).



12절, 강해 주석 해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예수의 답변은 또 다시 ‘칼 와호메르’(qal wahomer)의 성격을 띠고 있다(6절). 즉 한마리 양과 한 인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 144:3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생각되어지는 존재이다. 본문에 나오는 손 마른 사람은 웅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보다 물론 귀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진 양은 건져낼지언정 손 마른 사람에게 자비(mercy)를 베풀려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송사하려는 것의 도구로 삼았을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께서는 만일 안식일에 동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훨씬 의롭고, 보다 당연한 처사(conduct)임을 주장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옳으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셨다. 저들은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규정된 법규만을 지키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으셨다. 예수의 관심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악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선은 바로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mercy)를 베푸는 일과 연관된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행위를 무죄한 것으로 선언하신 7절의 말씀을 연상(association)시킨다. 즉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위나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예수 자신의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 선한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막 3:4, 눅 6:9에서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주제로 한 예수의 반론(反論)에도 역시 저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함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비록 안식일에 이뤄진다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자명(selfevidence)하게 인정되었다. 실로 안식일에는 세속적 관심에 대해서는 쉬어야 하겠으나 하나님과 인간 생명과 관련된 선한 일에 대해서는 열심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13절, 강해 주석 해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마태는 지금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하고 불신앙적인 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손이 마른 자가 예수에 대해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병자 약한 자를 고치셨을 때와는 달리 병자의 몸에 손 조차 대지 않으시고 다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그대로 즉시 존재케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는 창 1:3의 말씀처럼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의해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 이러한 기적과 치유 앞에 우리는 예수의 권위에 찬 말씀과 더불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예수의 말씀이 옳은 것임을 확신케 된 손 마른 자의 즉각적 순종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안식일에 대한 랍비들의 유전에 의하면 손 마른 자는 결코 병고침을 받아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악을 꾸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뻔했던 그는 안식일에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닫고 자신을 예수의 신성(神性)을 입증하는 선한 도구로 기꺼이 제공했다. 실로 그러한 순종과 결단에 의해서 그는 부자연스러운 육체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는 축복을 부여받게 되었다.


회복되어 성하더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밀이삭 사건을 통해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손 마른 사람의 사건을 통해서는 사람을 온전케(육체와 영혼 모두를) 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여기서 ‘회복되어 성하더라’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포카디스테미’의 과거형이 사용되어 ‘완전하게 나았다’, 즉 이미 완치(完治)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의 순간이 손을 내밀기 이전이었는지 이후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손을 내미는 것은 바로 손이 낫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행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Alford). 예수께서는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께 간청하는 환자들의 병을 고치셨었다. 이번의 경우에도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당신의 명령에 대해 순종과 믿음의 고백으로서 그가 손을 내밀므로 그의 병을 고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은 듯싶다. 그리고 한편 병자의 믿음의 고백은 치유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 치유의 병행 조건이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주장한 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진리와 부합(符合)된다. 진정 예수로 말미암아 나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참으로 낫고자하는 깊은 열망을 동시에 가졌었던 손 마른 자는 예수의 창조적인 능력 앞에 온전케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14절, 강해 주석 해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이는 예수를 율법 위반자로 규정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동일한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결별 선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랍비가 아닌 더 이상 접촉해서는 안 되는 한낱 부정(惡)한 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안식일에 예수께서 선(善)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신 것과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악을 꾀하여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한다는 것이참으로 아이러니킬(ironical)하다. 시갈(Sigal)은 여기서 사용된 ‘죽일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소스’이 ‘죽이다’의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회당의 결의에 의해서 파문시키다’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이 단지 할라카식의 논쟁(율법규정에 대한 해석 문제)으로, 그들의 견해와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서 사람을 처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떠한 행동들을 해야만 율법의 주장과 일치하는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한 것에서,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만물의 주요, 성전의 주이시며,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서 무죄로 선고받고 그 정당성을 부여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살해 의지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한편 막 3:6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를 죽일 모의(conspiracy)를 하고 있다고 기록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헤롯당(Herodians)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의 많은 이견(異見)이 있다. 어떤 학자는 바로 그 점이 마태복음이 A.D.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이론을 입증시킨다고 주장하였다. A.D. 70년 이후에는 헤롯당이 유대 땅에 존대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유일한 적대세력을 바리새파이기 때문에 굳이 헤롯당이 거론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마태가 이 말을 생략한 것으로 이해된다(Hummel, Hill). 그러나 이것은 마태의 기록 의도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즉 마태는 율법의 위반(unlawfulness)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고자 했던 주도 세력이 바리새인들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살의(殺意)를 실천키 위해 정치적인 세력(헤롯당)을 이용했던 것이다. 본문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 예수 살해 의도는 이후로 예수의 선교 사역이 더욱 빛을 보면 볼 수록 노골화, 구체화 되어간다.



15절, 강해 주석 해설


예수께서 아시고

여기 ‘아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그누스’은 ‘알다’는 뜻인 ‘기노스코’의 제 2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벌써부터 확연히 인지(認知)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의 신적(神的) 능력의 탁월성을 암시하는 것인 동시에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색(梗塞)되고 분노에 찬 모습이 노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거기를 떠나가시니

헬라어 ‘아나코레오’은 ‘철수하다’, ‘물러가다’(KJV, withdrew)의 뜻으로 이는 바리새인들의 의논이 예수를 죽일 모의와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의가 당장 실천의 차원으로 직접 예수를 배척하거나 죽이려고 시도했던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려 물러나시곤 하였으며 또한 마태도 예수의 물러나심에 대한 기록 뒤에 반드시 구약의 인용문을 첨가하여(2:22, 23, 4:12) 예수의 이 행위 마저도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 그대로의 모습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더욱이 예수의 이 피신(避身)은 당신이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지혜로운 위기 극복법(10:23)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기도 했다.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좇는다’고 하는 동사가 제자됨(fellowship)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이 날이 비록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맞서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많은 병자들이 속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시도(attemot)하고 있는 소수의 바리새인들과 대조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특별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20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에 의하면 예수가 많은 병자들을 고친 행위가 바로 심판에서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의 긍휼과 사랑의 역사(役事)임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과 수고하여 무거운 짐진 자들(11:28), 그리고 연약한 자들에게 결코 냉담하지 않으시고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예수는 바로 그들의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16절, 강해 주석 해설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예수의 함구령은 그가 행하신 치유 기적이 그를 사람들의 눈에 더욱 더 강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대중들의 흥분이 더욱 더 고조되고(W. Argyle), 따라서 그 일이 반대자들의 적대감을 더욱 더 크게 부채질하게 될 것임을 염려하여 내려진 명령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이미 네번에 걸쳐서(8:4, 9:30, 16:20, 17:9) 행해진 바대로 예수 자신을 단순히 기적행하는 자로 나타내시지 않기 위해서 내려진 함구령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상(像)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서 신적(神的) 권능을 소유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아 이외의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불치(不治)의 병들을 치유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당장 그에게 몰려들어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당신의 메시아 사역을 감당치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려지는 이 함구령(緘口令)의 시한(時限)은 막 9:9에 의하면 부활 때까지인데 이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부활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절, 강해 주석 해설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이하에 인용된 사 42:1-4은 70인역(LXX)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한편 이사야의 인용구는 바로 앞의 예수의 함구령과 연관해서 성령과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두 주제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Cope, Hill). 즉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19절) 성령부음을 받은 그가 공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이방인들은 그의 이름을 바라게’(21절)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행위자(agent)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무엇보다 무리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예수의 사역이, 곧 이사야가 예언한 바 메시아 사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전파하신 천국을 영적이고도 의로운 관점에서 가르치고 계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는 격앙된 분위기로 군중을 선동(煽動)하거나 폭발적인 소문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exposure)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는 당신으로 인해 약한 영혼들을 거스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18절, 강해 주석 해설


나의 택한 종 …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사 42:1, 43:10, 44:1의 인용으로 특별히 ‘나의 택한 종’이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신 나의 종’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한 이상적(理想的) 종을 붙잡으셨는데, 그런 점에서 ‘붙잡다’는 말은 선택한 자를 내밀(內密)하게 기억하시면서 지극히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라는 표현은 이미 예수께서 침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들려왔던 소리(3:17, 17:5)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만족과 인정과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서로 밀접(密接)하게 관련된 것이므로, ‘마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범주(category)안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의 역할까지도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킹스베리(Kingsbury)의 견해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막 3, 11)을 생략하고, 본문에서는 다만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보는 힐(Hill)의 견해가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예수는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 선택된 바의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설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선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부은 자이다. 한편 본분의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명사 ‘파이스’은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종종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종’이라고 불리웠다(사 41:8). 따라서 이 ‘파이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통용되고 있는 ‘둘로스’과는 달리, 종으로서의 메시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임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 말이다.


내 성령을 줄터이니

하나님이 당신의 영(spirit)을 주신다는 것은,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활동하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참여 의사(will)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초월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한 것이 되며, 이같이 주어진 능력과 권위의 실현은, 곧 이 땅에 하늘 나라가 도래했음을 입증해 주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28절).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이방에 심판을 알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인 메시아의 독특한 직무에 해당된다. 한편 이 직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여기서 ‘심판’의 뜻인 헬라어 ‘크리시스’이 ‘율법’, ‘판결’, ‘정의’, ‘결정하는’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미쉬파트’에 해당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심판’이라고 해석된 이 단어에 대해 (1) 델리취(Delitzsch)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생(生)의 규범과 표준으로서 종교의 실제적인 면을 보인 ‘진실한 신앙’으로, (2)헨드릭슨(Hendriksen)은 죄인들의 회개하고 주 예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복음’으로, (3) 칼뱅(Calvin)은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공평과 의(義)의 충만함을 정체(正體)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의 한 구석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 메시아의 임무라고 하였으며 (4) 알포드(Alford)의 경우, 심판은 바로 최후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5) 카슨(D.A. Carson)의 경우,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심판 혹은 공의란 하나님이 모든 이방 나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는 것(사 51:4)인 동시에 사람들이 계시(revelation)된 하나님의 본성, 즉 공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제견해들에 비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계시되고,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공의,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재천명하시고 그의 제자들이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經綸)의 대강(大綱)으로서 예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전파 경로가 암시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원래 목적하신 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우선 복음이 전파될 것이지만(10:6, 15:24), 그들의 핍박과 배척으로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이었다(8:10, 15:28). 이러한 사실은 선교의 지상 명령 부분(28:19-20, 행 1:8)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19절, 강해 주석 해설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메시아의 직무에 이은 그 이행 방법 또는 태도 중의 하나이다. 한편 아사야의 예언에서는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사 42:2)로 묘사되어 원래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제시된 ‘다투다’는 말은 언쟁이 심화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아사야의 의도처럼 ‘큰 소리로 외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함께’들레다’의 뜻인 ‘크라우가조’은 ‘부르짖다’, ‘야단스럽게 떠들다’(cry out, KJV)를 의미하는데 이는 종교적 기쁨이나 소리나 전쟁에서의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전 9:17)과 대조(contrast)를 이루는 ‘우매(愚昧)한 어른의 호칭’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크라우가조’는 신약이외에서는 마술과 악마의 영역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불러내는 소리로 이해되었다. 신약에서도 이 말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귀신들이 지르는 것으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막 5:5, 9:26)를 말하며, 행 19:28에서는 왁자지껄하는 폭도들의 소란으로, 계 21:4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부터 쫓겨난 분노를 나타내는 외침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나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歎願)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역시 고난과 섬김의 종인 메시아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메시아가 논쟁하지 않고 외치지 않고 길거리에서 소리 드높여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침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의 모습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메시아가 16절에서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얼마든지 그의 메시아 직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지금하고 계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참다운 종이란 그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함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20절, 강해 주석 해설


상한 갈대 … 꺼져가는 심지

이 표현은 종이 자비심이 많고 오래 참으시며, 온유하신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 표현에서 사용된 두 상징에 대해 카슨(D.A. Carson)은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11:28)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제롬(Jerome)은 전자는 이스라엘을, 후자는 이방인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상한 갈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유대 사회에서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육체를,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란 그들이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비유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상징하낟고 봐야할 것이다. 즉 ‘상한 갈대’란 연약한 인간(왕하 18:21, 겔 29:6), 고통과 좌절로 인해 심령이 산산히 부서져 쇠잔해 있는 영혼을 가리키며, ‘꺼져가는 심지’는 마지막 한가닥 소망마저 다 없어져가는 인생, 양심의 빛을 상실해 심령이 어두워져가는 영혼 등을 의미한다. 실로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원으로 소생하고, 꺼져가는 심지는 신령한 기름을 흡수(absortion)함으로써 회생(回生)할 수 있다(Clarke).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사 42:4에 의하면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로 메시아 직무 수행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심판하여 이길 때’란 월리암스(A. Williams)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의 계시를 인간의 마음에서 성공시키는 것’을 뜻한다. KJV에 의하면 이 구절은 ‘그가 심판을 승리로 몰고 갈 때까지’(until he expel to victory the judgment)로서, 고난의 종인 메시아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의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道)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의 악의 세력 위에 세우게 될 때까지를 말한다. 이는 긍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다.



21절, 강해 주석 해설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사 42:4에 의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다. ‘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의 기본 개념은 ‘거주 가능한 땅’으로, 이사야 본문에서는 내륙지방과 구별되는 해안지방(coast)을 의미한다. 해안지방은 부분적으로 뵈니게인과 블레셋인과의 교역(交易)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섬’이란 말이 가끔은 ‘이방’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또한 마태는 70인역(LXX)을 따라서 ‘율법’ 대신에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바라리라’(will put their hope, NIV)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기대한다’, 또는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실들에서 결국 이방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랑게(Lange)에 의하면 메시아의 이름은 ‘하나님의 진리를 요약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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