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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 1절-17절,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매일성경 큐티의 본문인 마태복음 13장 1절부터 17절의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소개하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비유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절-17절,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 매일성경 강해 주석 해설



마태복음 13장 1절-17절,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1절, 강해 주석 해설


그 날에

‘그것’ 또는 ‘그 사실’ 등 바로 앞 내용을 가리키는 말인 ‘에케이노스’이 첨가된 ‘그 날’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사건 또는 일이 발생된 바로 그 날을 뜻하는 말로, 과거의 어느 막연한 시기 혹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 ‘그 무렵 쯤’의 뜻을 가진 ‘그 때에’(토테)와는 구별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에 이 말은 천국 비유를 베푸신 그날은 자신의 육적(肉的) 모친과 그 동생들이 주님을 찾아온 바로 그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즉 예수 자신의 참 형제 자매와 참 부모는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임을 가르치셨던 날과 같은 날로서, 예수가 바로 이날 자신의 육적 가족을 만나 대접하는데 힘쓰지 않고 영원히 영적 가족이 될 이런 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비유를 가르치는데에 먼저 힘쓴 것은 결국 예수가 죄인들 모두를 당신의 가족으로 여겨 주시며 그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시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 마태가 굳이 ‘에케이노스’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이유이다.


집에서 나가사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과 잠시 집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집 밖 바닷가로 나오시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일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집안에서는 비교적 구원된 무리들, 즉 12제자를 중심한 그 가족과 동료들을 위한 제자훈련에 힘을 쓰셨던 것이다. 한편 옥외(屋外)에서는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장소는 산(5-7장의 산상수훈), 바닷가, 길가, 뽕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등 다양한 여러 곳으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셨다.


바닷가에 앉으시매

갈릴리 바다 혹은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우는 이곳의 해변가는 예로부터 레바논 산과 어우러진 푸른 물로 인해서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업(fishery)이 성해 소금에 절인 어류들이 멀리 스페인에까지 수출되었으며 전 국토가 메마르고 험한 팔레스타인에서는 비교적 기름진 곳으로서 디베랴, 벳새다, 가버나움, 고라신 등의 많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비교적 한적한 시간과 때를 택하여 이곳에 앉아서 둘러싼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단순한 목가풍(牧歌風)의 수채화적 감상을 넘어 일상생활의 타성(楕性)을 깨는 진리에 귀기울이는 구도자(求道者)들의 기쁨과 진실함을 느끼게 해준다.



2절, 강해 주석 해설


무리

원어 ‘오클로스’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플레도스’나 ‘데모스’과는 달리 천민 집단, 속(俗)된 무리라는 뜻으로 일종의 가치 판단이 개입된 말이다. 또한 ‘오클로스’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준수치 않고 또 그럴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는 낮고 천한 지위나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인 히브리어 ‘암 하아레츠’, 즉 ‘땅의 백성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예수께로 달려나온다거나(13:2), 예수를 찾아다닌다거나(눅 8:40), 예수의 전도여행에 줄곧 동행하던(막 5:27, 눅 7:9) 무리들을 지칭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종교의 상류층 사람들이 부르던 말이다. 어떤 경우에 ‘오클레스’는 예수의 친족보다도 더 그와 가까운 관계가 되기도 하였으나(막 3:31 ff)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구원자로서만 이해하고, 인간의 영원함과 관련된 영혼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메시아로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천국비유를 전파하시던 그 당시에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소형 어선은 보통 하나의 돛대와 두 개의 노(櫓)가 달렸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를 타시게 되었는데, 이 배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므로써 순식간에 형성된 군중집회에서 하늘나라의 새 소식이 조용하게 때로는 엄숙하게 선포되는 설교강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대개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육성(肉聲) 이외의 특별한 기계설비가 없던 때였으므로 비록 군중집회였다 하더라도 예수의 이 호반(湖畔) 설교의 분위기는 매우 고요하고 진지했을 것이다.



3절, 강해 주석 해설


비유

예수께서 비유 교수법(method of teaching)을 창시한 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비유를 활용하여 영적 진리를 유효 적절하게 가르친 사실에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탁월하다. 여기서 ‘비유’(파라볼레)란 ‘곁에’라는 뜻의 ‘파라’과 ‘던지다’는 뜻의 ‘발로의 합성어이다. 즉 이는 ‘옆에 던지다’는 뜻으로 한 사물을 또 다른 사물 곁에 놓아두고 대조, 비교함으로써 그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는 진리 교육의 한 방법이다.


씨를 뿌리는 자(호 스페이론)

여기 사용된 정관사 은 대표 단수로서 어떤 계층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씨 뿌리는 자’란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 즉 농부를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농부라면 일반적으로 다 경험하듯이’라는 뉘앙스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씨 뿌리는 자’란 말은 결국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시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밭에 씨를 뿌릴 때 농부가 직접 손으로 갈아놓은 이랑에 뿌리기도 하고 가축을 이용하여(가축의 등에 씨앗 담은 주머니를 달아 이동할 때마다 주머니에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씨앗이 떨어지게 함)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본문의 비유는 그러한 씨뿌리는 방법에 대한 관심보다 씨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씨 뿌리는 자’란 다음 세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예레미야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예언하면서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라”(렘 31:27)라고 선포했다. 실로 남은 자들의 거룩한 씨는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고 심기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자신. 예수 이전에도 선지자와 많은 교사들이 율법의 씨를 부지런히 뿌렸으나 많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자신은 밭의 종류에 따라 엄청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랑과 복음의 씨를 뿌리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된 37절에 따라 예수를 씨뿌리는 자로 이해하는 이러한 경우에 이 비유는 바로 자서전(自敍傳)적 요소를 갖고 있는 셈이다(Buttrick). (3) 모든 기독교인들. 귀중한 복음의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먼저 믿은 자들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로 하여금 신령한 씨를 뿌리도록 권고하였다(고전 9:11).



4절, 강해 주석 해설


길 가(파라 텐호돈)

이를 직역하면 ‘길을 따라’가 된다. 이는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리키는데 이 길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의해서 단단하고 반질반질하게 다져진다. 본문에서는 이 길이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청중(audience)을 의미한다. 본 비유에서 ‘길가’의 결정적 특징은 마음이 굳어져 새로운 씨가 자신의 내부에 뿌려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영혼이 복음으로 대표되는 새 진리에 대하여 아예 처음부터 철저히 배격, 거부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 두가지 경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의식적 원인 :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학식만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 (2) 무의식적 원인 : 이 땅에서의 삶이나 목숨보다는 영생의 문제라고 하는 복음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채 깨닫지 못하여 아예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솔한 무지와 부주의한 태만에 의한 것이다.


팔레스타인에는 약 삼백여 종(種) 이상의 새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흔한 새가 바로 ‘참새매’이다. 레 11:16과 신 14:15에서 부정한 새로 분류된 이 새는 유대 땅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특별히 이 새를 염두에 두셨는지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새에 의해 상징되는 악한 자, 즉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복음의 씨앗을 그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放置)하고 있거나 나중 일로 미루어 지체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진리를 경험할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은 복음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거된다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받을 수 있다. 실로 길가 밭과 같은 사람은 씨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하였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천국과 멸망의 길이 판가름나는 결정적인 것이다. 사실 복음의 반대 세력은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거부된 씨앗을 앗아가기 위해 혈안(血眼)이 된 채 적극 활동하고 있다.


먹어 버렸고(카테파겐)

이는 ‘철저하다’는 뜻의 ‘카타’과 ‘먹다’는 뜻의 ‘에스디오’의 합성어로 조금도 남김없이 완전히 먹어치워버렸음을 나타낸다.



5절, 강해 주석 해설


흙이 얇은 돌밭

팔레스타인에서는 매우 흔한 지형으로, 석회석 지층 위에 얇은 지표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히 바위의 온기(溫氣)에 의해 뿌리가 쉽게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계속 성장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돌밭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단순하고도 피상(皮相)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대표한다. 흙의 얕음은, 곧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 인격의 천박성 또는 경박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형상화시켜 주는 표현이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그 행동은 빠르나 지속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물질문명과 기계의 발달로 극도의 속도와 거대한 분량만을 추구함으로써 대부분 인간의 심성이 표피화되어가며 또한 기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돌밭 유형의 사람들을 더욱 빈번하게 만나고 발견할 수 있다. 실로 복음의 진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영적 토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선한 목적을 추구한다해도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표피화(表皮化)된 인간 심성과 경박함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6절, 강해 주석 해설


해가 돋은 후에

식물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영양분도 필요하지만 태양열 또한 필요한 것이다. 태양열은 탄소동화 작용등을 통하여 식물의 생장에 결정적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흙이 씨로 비유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상태를, 뿌리가 씨(복음) 자체에서 나온 생장력을 가리킨다면 여기 해는 그 복음의 씨가 계속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연단과 훈육을 가리킨다 하겠다. 즉 씨 뿌리는 행위가 단회적인 반면 여기 해는 계속적인 에너지 공급 행위, 즉 일반적 신앙 생활을 통한 신앙 훈련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니면 여기 해가 돋은 후에는 순간적 감격이 끝나고 이제 신앙인이 되어 일상적 신앙생활이 시작된 후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7절의 가시와 비교하자면 둘다 땅위에서 연단(鍊鍛)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해가 응당 치러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면 가시는 제 욕심, 염려에 의한 불필요한 시련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여기서 밭은 곧 인간의 영혼 상태의 상징이며, 얕은 돌밭은 결국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상태의 심성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즉 겉마음은 경박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 속마음은 성령에 의하여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밭으로는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관성과 성실성 그리고 끈기가 요구되는 신앙 생활이 시작되어 해, 곧 시련이 봉착하게 되면 곧 그 복음의 씨는 말라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자에게는 영적 소망을 기대할 수 없다.



7절, 강해 주석 해설


가시떨기

이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칸다’은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타인에서는 거의 사계절에 다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도 약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성경에서 가시는 주로 약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4), 이스라엘의 적(민 33:55, 수 23:13, 겔 28:24), 저주(창 3:18), 황폐함(사 9:18) 등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본문에서의 가시떨기는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적 장애요소로서, 복음의 씨의 기운을 꺾어 버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시떨기 밭은 가시가 자랄 수 있을 정도의 지력(地力)이 감춰진 곳이지만 생장력이 강한 가시나무 외에 다른 채소나 곡식은 결코 함께 자랄 수 없는 거친 땅이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개간(開墾)된 밭 옆에 흔한 가시떨기가 자라는데 이곳에 밀이나 보리 씨가 떨어져 같이 자라는 수가 있다고 한다. 이때 곡식 낟알의 푸른 껍질까지는 생기지만 내용물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를 알고 믿은지 상당히 오래 되었으나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이 세 번째 부류의 땅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기운을 막았고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로는 ‘숨을 막아 질식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영적인 의미로는 이 ‘숨’ 또는 ‘기운’은 프뉴마을 번역한 말로 ‘성령’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았다’함은 믿는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모든 영적생활을 훼방하거나 혼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길 가 밭과 돌밭의 경우는 주로 밭내부가 문제였으나 여기 가시밭은 밭 외부가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앞의 경우들은 마음 밭이 아예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마음 밭 자체는 쓸만한데 그 마음 밭에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될 만한 부정적 씨앗이 더 많은게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 밭 내부도 좋아야 하지만 외적으로 각종 신앙적 장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기운찬 영적 생명력과 진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8절, 강해 주석 해설


좋은 땅

‘좋은’의 뜻으로 사용된 ‘칼로스’라는 말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땅이란 땅이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하며, 적절한 지력(地力)이 보존되어 있고(레 25:4, 5), 그리고 또 잡초들과 같은 씨앗의 성장에 불필요한 것들이 미리 제거된 순수한 땅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이 비유의 원래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혼의 심지가 깊고 성실한 자, 신앙적 줏대(fixed principle)가 있고 진리에 대해 순박한 자를 가리킨다 하겠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놀라운 수확량은 4분의 3의 상실, 즉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으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손실을 충분히 보상하고서도 남음이 있었다. 한편 결실의 창이에 대해서 포세트(Pausett)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십 배는 가장 적은 결실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며, 육십 배는 중간 정도의 결실이며, 백 배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의 곡식 낟알이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을 나타내기 위한 예로서 사용된 숫자이므로 모든 결실이 항상 30, 60, 100배의 숫자로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 200배 혹은 300배 까지도 결실을 맺을 수 있다(Herodotus). 어찌되었든지 이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데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듯이 결실을 맺는 데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결실을 하였느니라(에디두 카르폰)

헬라어 원문은 미완료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결실이 어떤 한계점에 도달할 만큼 겨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명력 넘치게 결실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한편 여기 결실은 (1) 내적으로는 복음 씨앗을 받은 각 성도의 영적 진보를, (2) 외적으로는 구속사 전개에 따른 천국 시민의 숫적 증가를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9절, 강해 주석 해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성경의 여러 용례에서 ‘귀’는 복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자주 등장한다. 즉 귀는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던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로 대치시켜 표현하는 것은 특히 히브리인이 즐겨쓰던 표현법이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함이며 따라서 그 말씀을 욕으로 여겨서 즐겨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렘 6:10). 이러한 경우에 그들은 영적인 귀머거리인 셈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귀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자요 그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준비하는 자를 의미한다. 한편 이는 비유 자체가 갖는 이중 목적,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욱 뜻을 명료하게, 순종할 의사가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참 진의를 숨기기 위한 목적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다.



10절, 강해 주석 해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기서 제자들이라고 해서 ‘12사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행구절인 막 4:10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 묻자오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예수께 나아온 제자들의 정체(正體)는 그렇다 해도 이들이 예수께 나아온 시점은 분명치 않다. 36절의 표현과 연결지을 때에는 군중집회 중 잠시 틈을 내었을 때의 일로 볼 수 있고 시간적 순서를 무시한 마태의 기본적 편집 태도로 보면 아예 군중 집회가 완전히 파(罷)한 뒤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일반 군중들 중에서 소수 제자들이 특별히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만은 중요하다. 그들은 예수 앞으로 나아오기까지 먼저 예수의 계신 곳을 찾는 수고의 과정을 겪었으며(연단), 바닷가에서 만난 예수의 비유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참고 기다린 이후에(인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를 제대로 알기 위해 예수께 나아와 질문을 하였으며(적극성), 그 결과 그들은 천국 도래의 비밀을 알게 되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어찌하여 …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이 물음은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비유의 사용 목적에 관한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방금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11-17절까지는 비유 사용의 목적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18-23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주시고 있다.



11절, 강해 주석 해설


천국의 비밀

여기서 먼저 ‘비밀’(뮈스테리온)은 원래 ‘닫다’, ‘가두다’는 의미의 ‘전수(傳授)받은 자’란 뜻인 ‘뮈스테스’ 이 파생되었고, 이 ‘뮈스테이’에서 바로 ‘뮈스테리온’이 파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Robertson) 이 용어를 단순히 동방의 신비 종교의 입문, 교리 교육 등에 관계된 용어로만 단정짓지만 오히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종말론적인 비밀을 지닌 셈족어의 ‘라즈’라는 말과 연관짓는 것이 좋다(R. E. Brown). 이 말은 다니엘서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단 2:18, 19, 27, 28, 30),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징조임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히브리어 ‘소드’(비밀)를 반영하는데, 이 ‘소드’는 사해사본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듯이, 천상의 회의에서 유래된 말이다(Brown). 결국 ‘뮈스테리온’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으로서, 때로 은밀한 말로 전달되기도 하며, 선택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항상 종말론적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한편 ‘천국의’라는 말이 비밀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비밀’이라는 말은 천국에 관한 내용이 문자 그대로 ‘닫아 둔 것’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일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그것을 닫아 둔 것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진리임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본문에 있어서 천국비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천국의 비밀이란 유대인들은 상상조차 못한 천국이 역사 안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의미한다(Ladd).


너희에게는 … 저희에게는

‘너희’는 12제자와 함께 주님에게로 모여든 소수의 무리, 즉 영적 의미로는 남은 자(remnant)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희’는 외인들(토이스 여소)로서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저희에 속하는 자들은 당장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는 비유를 깨닫는 자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므로 비유를 못 알아 듣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밖에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주시기를 싫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요 3:16, 딤전 2:4, 벧후 3:9),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할 때 우리는 신학의 한 핵심인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엡 1:3-13강해 참조). 그리고 ‘저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주어진 은혜의 말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 (2) 병고침,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모여든 군중들로, 결국 그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치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다(25:30).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밖에 있는 ‘저희’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자리에 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12절, 강해 주석 해설


있는 자 … 없는 자

이 말은 격언적 교훈으로서 마치 비정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예수가 동조(同調)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는 물질계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심으로써 영적 차원에서도 진리를 깨달은 자는 더욱 더 깨닫게 되고 진리를 거부한 자는 오히려 더욱 더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으로 조소(嘲笑)가 아니라 경고의 말인 것이다. 여기에서 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하며,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있는 자나 없는 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며 그가 행한 기적들을 ‘본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그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오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이다. 깨닫고 믿는 자에게는 그 나라에 참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에게 베풀어졌던 천국복음 마저도 악한 자들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멸망에 처해 질 수 밖에 없다.



13절, 강해 주석 해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11절이 비유를 사용하는 궁극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본 구절은 그 현상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사실 그대로 말해도 그들을 수동적으로 보자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보자면 아예 알아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보는 것(seeing)이 그대로 아는 것(knowing)이 되지 못하며, 듣는 것(hearing)이 바로 깨닫는 것(perceiving)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영적 불구자의 심령 상태, 곧 영적 소경(사 59:10, 막 4:12, 요 12:40, 롬 11:25), 영적 귀머거리(렘 6:10, 겔 12:2, 슥 7:11, 행 28:26)인 죄인의 영혼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보충적인 설명은 막 4:12의 주석을 참고하라.



14절, 강해 주석 해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의 예언은 사 6:9, 10에 해당하는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 문장은 이사야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지자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의 완악성(頑惡性)을 꾸짖는 말로 주신 간접적 예언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말씀이 당시의 비유를 듣는 무리들의 심령 상태에도 잘 적용되었기 때문에 동질성(同質性)이란 측면에서, 즉 이사야의 말이 당시의 무리에게도 잘 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예언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이하 인용된 14, 15절의 말씀은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으로서 문맥이 조금 불분명한 감(感)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사야서의 해당 본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도 11절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만 살펴서 형식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백성이 악하기 전에 마치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악하게 만드신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其實)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따라 완악해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강조 표명한 것으로서, 즉 사태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작정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는 11절에 인용된 바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란 심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루었으니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레루타이’ 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이라기 보다는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예수 자신의 시대에까지 적용되고 있음으로 해서 예언적 본문이 된 것이라는 예수의 해석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사를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일부 사람들이 복음 선교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현상적 원인(13절)과 그렇게 된 궁극적 원인(14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15절, 강해 주석 해설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완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퀴노’ 은 살이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제 스스로 살찐자가 되어서 영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실로 인간이 자기(육체적 삶) 중심적일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영적 생명력)과의 관계는 단절,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곧 허무와 절망의 제 1 보(步)이다.


듣기에 둔하고

여기서 ‘둔하고’란 말의 원뜻은 ‘눌러 내리다’(oppress), ‘짐을 지우다’(burden), ‘가리우다’(curtain)로서 가는 귀가 먹거나 말귀를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함을 알 수 있다.


눈은 감았으니

여기서 눈을 ‘감다’로 번역된 ‘캄뮈오’은 원래 ‘내리닫다’의 뜻으로서 눈에 밀납이나 기름 등을 바름으로써 억지로 감기게 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실지로 고대 사회에서는 누에 밀납을 칠해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스스로 눈을 감아 진리 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돌이켜(에피스트려소신)

이 말은 하나님 보다는 죄된 세상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전존재를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행위라는 뜻으로서 ‘회심’ 혹은 ‘회개’(메타노이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돌이킴’은 신앙 생활로 들어가는 제 1단계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5:7, 고후 7:10)과 제 2단계로서의 새생활에로의 전반적인 변화(막 1:15, 눅 13:3, 5, 행 2:38)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물론 제 1단계의 자각은 죄된 인간 자신의 반성과 회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제 2단계의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께 ‘고침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보다 일차적인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돌이킴(자각)이다(눅 15:17).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자각 조차 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길로 그대로 가도록 허락하심은 그들을 벌하시고자 결정하신 연고이다.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 …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접속사 ‘메포테’의 지배를 받아 ‘내가 고치다, 내가 낫게 하다’의 뜻인 ‘이아오마이’이 미래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고치면 ‘lest … and I should heal them’으로, 주절과 합쳐진 전체 문장의 주어는 그들(they)이 된다. 따라서 이사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는 달리 본서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은 백성들 스스로가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증거를 접하고서도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를 말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멸망받을 자로 자처한 행위를 말한다(행 13:46). 이것은 그들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다.



16절, 강해 주석 해설


너희 눈은 … 귀는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문장을 ‘너희 눈은 보니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으니 복이 있다’로 보다 정확히 번역해 보면 15절의 닫힌 눈과 막힌 귀와 잘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평히, 객관적으로 제시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에 따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옴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역(逆)으로 보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들으면 그만인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필수(obligation)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봄으로 … 들음으로

여기 보고 듣는 대상은 11절에 전제한 천국의 비밀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 비밀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천국, 즉 메시아의 나라가 이 역사 안으로 들어 와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주권)에 의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국민)을 규합하여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영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16절은 단지 개인적 관점에서 지금 주어진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지만 17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보고 또 들으려고 원해도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었는데 이것이 너희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음을 새삼 강조하면서 예수 이후 시대 사람들의 구속사적 특권과 책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복이 있도다(마카리오이)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행복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었다(5:3).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눅 1:45), 헛된 요구를 하지 않는 자들(요 20:29),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깨닫는 자들(요 13:17)이 각각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불리웠다.



17절, 강해 주석 해설


내가 진실로

‘진실로’라는 뜻의 헬라어 ‘아멘’은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 즉 축복이나 저주 등의 수락(受諾)을 확증하는 것으로서(대상 16:36), 또는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입증(대상 16:36)하기 위하여 기도와 송영의 끝에 붙여서 사용하였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말과 행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이 타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구속력이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말을 당신이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내용에 앞서 사용함으로써 이하 전개되는 말씀의 진정성(verity)과 진실성(truth)을 미리 확증하시면서 우리를 각성시키고자 하실 때 사용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 못하였느니라

많은 선지자와 의인(righteous men)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밖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苦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메시아를 영접했던 사람들 또는 그 이후의 우리들이야말로 단지 예언을 통해 메시아를 대망했을 뿐이며(히 11:13, 39)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열망했던 그 영광스런 특권의 실질적인 수혜자(受惠者)인 것이다(벧전 1:10-12, Homer A. Kent, Jr). 한편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의 개인적 자질이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뒤졌거나 또는 그들이 듣고 보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세워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질적 차이 때문이었다. 신약 시대의 우월성은 그 신약 시대에 속한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1) 더 큰 감사와 (2)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신약 시대의 축복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많이 받은 자가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개 때문이다. 한편 이런 구약과 신약의 질적 차이에 대한 언급으로는 11:11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신약 시대의 우리는 그 위대한 구약의 이사야와 다니엘, 아브라함과 다윗도 보고 듣지 못한 천국의 위대한 비밀을 알게된 큰 축복을 받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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