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3장 1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과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 대한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8절-30절, 세상 속의 천국
18절, 강해 주석 해설
그런즉 … 들으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 안된 ‘너희’(휘메이스)란 단어가 특히 강조된 구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이해하라’는 정도(De Wette)의 의미 이상의 뜻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갖기를 원하고 완악한 자들이 단호히 거부했던 영적인 진리를 알 특권이 ‘너희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측면에서 ‘너희는’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는 강조적 구절이다.
19절, 강해 주석 해설
아무나(판토스)
‘모든 것’,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파스’ 속격으로, 본문에서는 ‘들으면서’(아쿠온토스)도 ‘깨닫지 못하는’(쉬니엔토스)의 뜻인 두 분사를 취하여 ‘누구든지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Ereryone hearing … and not understanding)의 뜻으로, 말씀을 듣고도 현재 깨닫지 못하여 그 말씀을 잠시 유보하거나(행 24:25), 또 다른 말씀, 즉 거짓 진리에 대해서도 귀기울이며 이것 저것을 망서리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천국 진리의 말씀을 잃게 된다고 하는 말이다.
천국 말씀
막 4:14과 눅 8:11에 의하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씨는 기록된 말씀들로서의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직 기록되지 않은 말씀, 즉 예수의 복음이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천국이 도래했다는 벅찬 내용으로 전파되고 있는 말씀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요 1:1) 그분 자신이 바로 보이지 않는 씨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신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요 5:39).
악한 자
마가는 이를 ‘사탄’이라고 (막 4:15) 했으며, 누가는 ‘마귀’라고(눅 8:12)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역할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뿌리워진 씨앗으로 하여금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직접적 개입이나 그 하수인(새들)을 통해 복음의 청취자가 지닌 영적인 은혜를 즉각 앗아간다(Homer A. Kent, Jr., 렘 5:26, 27). 실로 악한 자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가 하면(벧전 5:8)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진리의 말씀에 회의하고 외면하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길 가에 뿌리운 자(호돈 스파레이스)
이는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3절에서의 ‘씨 뿌리는 자’ (호 스페이론)와 대구를 이룬다. 즉 ‘뿌리운 자’는 씨를 받는 자, 즉 선포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을 가리키며, ‘씨 뿌리는 자’는 선포자로서의 예수, 혹은 제자들, 혹은 전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은 아직 말씀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로서,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청중(the unresponsive hearer)이다. 그 사람들은 ‘새’로 비유되고 있는 사탄에 의해 결국 말씀에 응답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20절, 강해 주석 해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씨가 뿌리워진 돌밭’과 같은 사람이라 함은 흙이 얇은 관계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싹과 비유하여 ‘심지가 굳지 못하며 경박한 마음의 청중’(the shallow hearer), 또는 철저히 감정적인 청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듣는 순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시련들(태양)에 대해서 인내로써 대처하지 못하고 그 시련에 의해 넘어지는 자이다.
기쁨으로 받되
말씀을 들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지고서 귀기울이거나 또는 말씀을 기쁨의 대상, 즉 은혜나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인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로 알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러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agree)하면서도 그들은 확신(assurance)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21절, 강해 주석 해설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여기서 뿌리가 없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대한 그 개인의 인격적 확신이 결여(缺如)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누가는 ‘잠깐 믿다가’라는 연결구를 덧붙임으로써(눅 8:13) 복음에 대한 즉각적 수용 뿐만 아니라 인격적 확신에 근거한 지속적인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환난이나 핍박
환난을 뜻하는 말인 ‘들리프시스’은 ‘밀어대다, 몰려대다, 답답하게 하다’의 뜻인 ‘들리보’에서 나온 말로서, 삶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서 억압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핍박을 뜻하는 말인 ‘디오그모스’은 도망가는 노예를 잡기 위해서 개를 보내 추격하게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디오코’에서 나온 말로서, 본문에서는 종교상의 ‘박해’를 가리킨다. 결국 이 두 낱말은 한 개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만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거침돌을 의미한다.
넘어지는(스칸달리조)
함정, 올가미, 덫 또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뜻하는 ‘스칸달론’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서는 죄에 빠지다, 배반, 배교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또한 환난이나 핍박으로 인해서 생겨난 갈등으로 어리둥절하거나 휘청거리는(stumble)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22절, 강해 주석 해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환경, 물질 등의 외부적 요소가 가져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방황하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가시떨기 밭은 그 토양 자체는 비옥하나 밭 위가 손질되지 않아 유익한 곡식과 가시떨기가 함께 자라난, 즉 순수와 세속이 혼재(混在)된 자아의 분열된 심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의 재물을 겸(兼)하여 섬기려는 사람이며, 세상의 유혹에 귀기울이므로써 말씀이 그 마음 안에서 질식(窒息)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에 물든 청중’(the worldly hearer)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격은 결단코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세상의 염려란 내세(來世)에 대한 관심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6:25-34). 즉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눅 12:22)하는 현세 위주의 생각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와 용기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염려’라는 뜻의 헬라어 ‘메림나’ 은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라는 뜻이다. 실로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을 향한 욕구로 혼탁해지고 나누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정(淨)함이 없다(약 1:8). 그리고 재리의 유혹은 ‘재물의 즐거움’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부요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하는 욕망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리’란 ‘많다’, ‘풍성하다’의 뜻에서 나온 ‘플루토스’ 라는 말로서, ‘풍성한 재물’ 혹은 ‘부요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재리의 유혹이란 재물 자체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필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오류(誤謬)에 빠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주께서 그 쓸 것을 미리 알고 채워주시므로 현재의 삶에서 겪게 되는 물질의 빈곤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부’보다는 하나님께 부요함으로써 영원한 기쁨과 세상이 주는 거짓 기쁨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말씀이 막혀
여기서 ‘막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프니게이’ 은 ‘질식시키다’, ‘숨막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 욕심이 영혼의 양식과 청결한 공기 및 거룩한 햇빛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하는 우리의 영적 숨통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정녕 말씀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주는 환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세상이 지닌 파괴적 영향력으로 인해 거룩한 신앙적 성품과 영적 생명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결실치 못하는 자
천국 복음을 수용한 자의 궁극적 목적은 한 인격에 내재한 복음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열매 맺는 전(前)단계(싹, 잎, 줄기 등)가 아무리 탁월하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23절, 강해 주석 해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
이는 귀기울여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갈 5:22, 23) 성공적인 청중들(the successful hearer)의 상태를 일컫는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철저한 자기 부인과 겸손한 수용의지를 통해 복음을 듣고, 수납(受納)하고, 그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풍성한 영적 결실을 이루게 된 자를 가리킨다.
혹 백 배 … 혹 삼십 배
소출(所出)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사의 다양성 및 천국 복음을 받아들인 각 개인의 기질과 능력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25:24-30).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결실을 한 땅이라 해도 결실했다는 그 자체로서 ‘좋은 땅’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만 한다.
24절, 강해 주석 해설
천국은 … 사람과 같으니
여기서 ‘ … 과 같다’는 말은 아람어의 관용적 표현인 ‘X의 경우는 Y의 경우와 같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Jeremias). 따라서 본 구절은 ‘천국은 … 한 사람의 상황(경우)과 같으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좋은 씨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한 종류의 좋은 씨앗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반면 본문의 좋은 씨는 마지막 주님의 심판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제 밭에 뿌린 사람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하는 설명(37절)에 따르면 본문의 구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하여 그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이다. 주의 몸된 교회만이 그의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제 밭’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말과 의미상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 그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나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사람의 거듭난 탄생을 위하여 세상을 보호하시고 가꾸신다.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악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다.
25절, 강해 주석 해설
사람들이 잘 때에
여기서 ‘잘 때에’란 농부의 태만함을 꼬집는 말이 아니라 원수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를 암시하는 말이다. 사실 악한 어두움의 세력은 주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警戒)도 하지 않는 평화와 안식의 시간인 밤에(at night) 활동한다. 여기 농부의 원수도 농부가 휴식을 취한 밤에 몰래 들어와 악한 씨앗을 뿌리고 간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로마에서는 보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잡초들을 뿌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라지(지자니온)
독보리(lolium temulentum)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얼른 식별하기 어렵고,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급한 설사와 구토 등의 여러 증상이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예수의 설명에 의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38절), 사람들을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또한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41절). 그들의 특징은 (1) 위장성(僞裝性). 곡식과 가라지가 싹이 난 초기부터 결실을 거둘 때까지 사람들의 눈에 잘 분별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성도들과 잘 분간되지 않도록 위장되어 있다. (2) 잠복성(潛伏性).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가지의 외형과 생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끼친다. (3) 해독성(害毒性). 가라지는 알곡 뿐 아니라 인체에까지 큰 피해를 안긴다.
덧뿌리고 갔더니(에피스페이로)
‘위에’를 뜻하는 말인 ‘에피’과 ‘씨를 뿌리다’의 뜻인 ‘스페이로’의 합성어로서,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레 19:19과 신 22:9에서는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다. 이는 두 씨앗 중 어느 한 씨앗의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조항인 동시에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상징하는 교훈적 율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나안의 이방신앙과 그들과의 혼혈 결혼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악한 씨앗, 곧 가라지의 씨앗을 곡식의 씨앗 사이에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것이었음이 명백해진다.
26절, 강해 주석 해설
결실할 때에
열매로써 그 나무나 씨앗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7:17). 여기 가라지도 생장기에는 그 악한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결실기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결실의 때는 영적으로 최후심판이라고 하는 마지막 추수기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악의 세력과 죄악의 관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때는 고난의 때이고 신앙의 시련을 통과하는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과 영생이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 곧이어 실현되려고 하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10:22).
27절, 강해 주석 해설
집 주인
씨뿌리는 자의 비유(3-23절)에서는 예수를 비롯한 12제자들과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씨뿌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가라지 비유에서의 씨를 뿌리는 일은 오로지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비록 종들이 가라지의 연유(緣由)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집 주인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원수의 방문에 의한 것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구별 및 그 기원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신 한 분은 오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뿐이시다.
주여(퀴리에)
‘주’라고 하는 호칭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다. 예수를 부를 때 ‘주’라고 하는 호칭과 ‘선생’이라고 하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자들은 주로 제자들(8:25, 14:28, 16:22) 또는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8:8, 20:30)이며, 예수를 ‘선생’으로 부르는 자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유대 지도층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주’라 함은 예수를 하나님으로서, 즉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선생’이라고 함은 그를 다만 예언자들중의 하나 또는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대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시므로 마땅히 우리가 불러야 할 호칭은 ‘랍비’(선생)가 아니라 ‘퀴리오스’(주님)이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실은 바로 ‘좋은 씨 사이에 어떻게 가라지가 섞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악이 이 세상 혹은 교회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 물음이다. 악은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유형, 무형의 부정적 실재로서 이는 현상학적으로 말하는 선(善)의 부재 혹은 결핍의 상태(Augustine) 이상을 의미한다. 아무튼 ‘인류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사상을 괴롭혔고 신앙을 시험한 이 악의 기원에 관한 악명높은 물음’(John S. Whale)에 대해서 성경은 종말의 날에 모든 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파멸당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16:20, 요일 3:8, 계 20:2, 10).
28절, 강해 주석 해설
원수
‘미움’, ‘증오’의 뜻인 ‘에크드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인 의미로는 ‘원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하는 자이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이다.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종들의 이 두 번째 질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밭에 있는 가라지를 지금 당장 모조리 뽑아 버리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성급함과 경솔은 추수(秋收)의 ‘때’(카이로스)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영적 우둔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29절, 강해 주석 해설
가만 두어라
‘그대로 가만 두고 지켜보도록 하라’는 의미로서, 이는 바로 이 세상의 악의 세력들에 대한 주님의 지혜롭고 여유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악의 근절(根絶)을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더해지기 위한 도구로 사탄이 이용되는 때 뿐이다(욥 2:4-7, 눅 13:16).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악을 멸하시지 않고 있다.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리지를 뽑을 때는 종종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힌다. 따라서 곡식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 가라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 종들의 열의 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30절, 강해 주석 해설
추수 때에(엔 카이로 투 데리스무)
추수는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비유이다. 심판이 행해지는 종말의 때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시간적 의미를 가짐과 함게 성취, 완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버리며 최후의 대심판에 의해 악한 자는 영원히 멸망할 곳으로, 의인은 추수가 끝난 마당에서의 축제와 같이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함께 자라게 두어라
여기서 ‘두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테’ 은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 상태대로 방치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집 주인의 주권적 명령으로서 ‘내가 그대로 자라게 내버려두기로 결정했으니 너희들은 관여치 말라. 너희들의 소관(所關)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수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에서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박해때 어쩔 수 없이 배교(背敎)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박해가 끝나자(A.D. 4C경)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도나티스트파) 한 번 배교하여 파문(破門)을 당한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하여지자 성(聖)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자들을 함부로 제거해서 교회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실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16:17, 18)토대로 하여 세워진 하나의 거룩한 몸이다.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절대 완전한 천국 상태에 있다기 보다는 세상 끝날까지 알곡과 가라지, 즉 의인과 악인의 복합체(複合體)의 상태로 존속(存續)할 것이다.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결실기에 이르게 되면 가라지는 알곡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로써 추수 일꾼은 손쉽게 가라지를 수거(收去)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알곡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곡이 가라지보다 많이 수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더불어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고 하는 표현은 가라지의 숫자도 꽤 많은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일상적인 추수 방법, 즉 알곡을 먼저 단으로 묶어 곳간에 들인 다음 쭉정이는 한 곳에 모아서 불사르는 것과는 달리 가라지를 먼저 추수하는 독특한 방식은 재림하신 예수께서 그의 대적 마귀의 우두머리를 먼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처넣기 위에 결박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이 완전히 도말되는 것으로부터 완성될 것이다.
곳간(아포테케)
‘위’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과 ‘두다’, ‘쌓다’의 뜻인 ‘티데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거하실 안전한 처소, 곧 하늘에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집으로 의인(義認)된 성도들만이 들어가기를 허락받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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