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마태복음 13장 31절부터 43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을 비유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은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나중에 크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큐티와 새벽설교를 위한 주석과 해설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1절-43절, 성장하는 하늘나라
31절, 강해 주석 해설
겨자씨(시나피)
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앗 보다 작은 것(32절)이지만 생장력(生長力)이 대단하여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약 3m 가량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그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한다(F.R. Fay). 이러한 겨자씨를 예수께서 천국에 비유하신 것은 겨자씨가 지니는 몇 가지 특성 때문이다. (1) 은밀성. 겨자씨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확연히 노출되지 않은채 조용히 성장해 간다. (2) 확장성.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비록 현재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게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나중은 창대해질 것이다. (3) 변화성.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만한 변화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크고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마 17:2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시작과 성숙한 끝맺음의 유기적 결합(Dahl)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예수의 사역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복음의 결과로서의 교회는 예수-12제자-120문도에 의해서 발전되어 현재는 온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되었다.
32절, 강해 주석 해설
모든 씨보다 작은 것
예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검은 겨자씨(sinapis nigra)는 비교급 ‘미크로테론’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 ‘보다 작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 유대 격언에서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할 때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그 크기는 매우 작은 것으로 공동 인식하고 있었다(Buxtorf). 더욱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씨의 크기가 아니라 씨의 결과인 나무의 크기이다.
공중의 새들
겔 31:6과 단 4:12에서의 ‘공중에 나는 새’는 하늘까지 닿은 나무로 상징된 ‘대제국 앗수르’의 속국들과 ‘대제국 바벨론’의 속국들, 곧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많은 나라와 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에서의 공중의 새들은 겨자 나무, 곧 천국의 실체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를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영적으로 좀더 확대 해석하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즉 고통에 지쳐 평안과 안식을 갈망하며 쉴만한 곳을 찾는 인생들. 이들은 참 포도나무요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깃들이느니라(카타스케노오)
천막을 가리키는 말은 ‘스케노마’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살다’ ‘거주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스케노오’과 ‘아래’, ‘밑’을 가리키는 전치사인 ‘카타’ 의 합성어로서, ‘장막을 세우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 민 14:30, 신 33:12, 시 16:9에 의하면 안전하고도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행 2:25에 인용된 시 16:8에 의하면 부활 이후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겨자씨 비유에서의 새의 깃들임도 역시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 버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방울새와 홍방울 새와 같이 겨자나무에 떼를 지어 지속적으로 깃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33절, 강해 주석 해설
강해
본 누룩 비유는 해석상 여러 견해가 전해진다. (1) 부정적 측면에서, 여자를 악한 존재(슥 5:7, 8), 곧 이세벧(계 2:20), 큰 음녀(계 17:1) 등으로 이해하여 가루로 표현된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누룩으로 보는 것이다(랍비전승). (2) 긍정적 측면에서, 교회의 지역적 확장 내지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 등으로 이해한다. 물론 두 견해 모두 그 타당성이 있으나 두 번째 견해가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여자가(귀네)
누룩의 헬라어인 ‘쥐메’과 대구를 이루도록 선택하신 예수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단어이다. 한편 남자의 활동이 앞의 겨자씨의 비유에서 처럼 외적(外的)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본문에서의 누룩의 역할과도 같이 집과 교회와 다른 여러 사회공동체 속에서 그 활동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를 놀랍게 변혁, 성장시키는 내적(內的)인 변화를 가져온다.
가루 서말(사타 트리아)
NIV성경은 가루 서말을 ‘많은 양의 가루’(a large amount of flour)라고 번역하였는데 아마도 가루 서말이란 여인이 하루에 빵을 구울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의미하는 데서 표현된 말일 것이다. 여기서 ‘말’을 뜻하는 ‘사타’는 히브리어로는 스아이며 에바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따라서 ‘서말’은 1에바로서 약 22-23리터에 해당된다. 이것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 세 사람을 대접하기 위하여 준비한 분량(창 18:6)이나,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무교전병(無교煎餠)을 만들어 드린 양(삿 6:19),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그를 여호와께 드릴 때 제물로 가져가던 소제의 양(삼상 1:24)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1오멜(Omer 약 2.34l)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던 것(출 16:33, 36)에 비추어 볼 때 하루서말의 분량 1에바는 10오멜에 해당하므로 아마도 가족 9-10명의 하루 세끼 분량의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누룩과 같으니라
‘끓어 오르다’, ‘끓이다’의 뜻인 ‘제오’에서 유래한 말인 ‘쥐메’은 누룩, 효모(yeast)를 가리킨다. 성경에서의 누룩은 보통 교만이나 죄된 욕망(고전 5:6), 또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대적자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부패하고 썩게 하는 요소(16:6, 막 8:15, 눅 12:1)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의 예수의 비유 속에서의 누룩의 의미는 그것의 부정적, 긍정적 결과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는 놀라운 변화력과 정복(征服) 능력에 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보잘 것 없이 시작된 천국 복음은 세상 곳곳을 묵묵히 정복해 들어가 그곳의 많은 사람들을 죄된 욕망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진정한 변화의 요인이 되었다.
34절, 강해 주석 해설
비유가 아니면 …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말씀하지 않았다는 뜻의 동사 ‘엘랄레이’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과거의 단 한 번의 동작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과는 달리 습관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말이 ‘ … 을 제외하고’, ‘밖에’라는 부사 ‘코리스’과 연결됨으로써 본문이 예수께서 오로지 비유로만 이야기하고 다른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비유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본문은 단지 그날은 ‘천국’을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기 위해 특별히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하는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
35절, 강해 주석 해설
선지자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라는 의미로, 어떤 사본(시내 사본, 에티오피아 사본 등)에 의하면 선지자라는 말과 더불어 ‘이사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인용문은 시 78:2에서 인용한 것으로 (70인역에서는 시 77편으로 기록) 저자는 ‘아삽’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선지자는 이사야가 아닌 아삽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사실 대하 29:30에 의하면 히스기야왕은 아삽을 선견자로 부른 적이 있었다. 한편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 찬송의 책임을 맡았던 베레갸의 아들로서 시편 중 12편의 뛰어난 시(시 50, 73-83편)를 지었다. 그의 이름은 헤만과 여두둔과 함께 다윗의 세 악사로서 언약궤를 에벧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특별히 여두둔과 아삽은 왕의 선견자(先見者)라고 불리웠다(대상 25:5, 6, 대하 35:15).
내가 … 비유로 말하고
이를 원문에 좀더 가깝게 해석하면 ‘내가 다른 일들과 비교해 가면서 말하고’가 될 것이다.
창세부터(카바볼레스)
이는 ‘밑으로’의 뜻인 ‘카타’ 과 ‘던지다’의 뜻인 ‘발로’의 합성어로서 ‘기초’, ‘창건’, ‘시작’을 뜻하는 말인 ‘카타볼레’의 소유격이다. 따라서 ‘창세부터’라는 말은 ‘세상(코스모스)의 기초가 놓여지던 때부터’의 의미를 나타낸다. 구약에서의 이 말은 ‘옛부터’(민니 -케뎀)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70인역(LXX)에서는 ‘태초로부터’(아프 아르케스)로 번역되었다. 한편 어떤 학자에 의하면 시 78편의 문맥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창세부터’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nation)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은 바로 전(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와 뜻이므로 어느 특정된 한 민족과는 관계없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되었던 것일 것이다.
감추인 것들(케크륌메나)
‘수수께끼’, ‘가려진 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도트’과 같은 말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소극적 의미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숨긴 것이라고 하는 적극적 의미가 잇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 또는 ‘옛 비밀한 말’(시 78:2)은 바로 구속(救贖)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들(Lindars)이며 과거의 사건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영적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제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밝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전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시는 계시자(啓示者)인 동시에 자신에 대해서 이미 예언, 선포되었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완성자가 되신다.
드러내리라(에르소마이)
감추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케크뤼메나’가 본래 사람이 은밀하게 선언한 것을 의미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에르소마이’는 ‘선포하다’, ‘크게 말하다’의 뜻으로 거칠고(rough) 큰(aloud) 한 마디의 ‘말을 토해 내다’, 강물이 콸콸 소리내어 흐르듯이 열정적인 마음으로 ‘연설을 하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삽이 비유를 통하여 유대의 지나간 역사와 사건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발표(發表)했듯이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대제사장, 서기관 등의 교권주의자들에게는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하는 ‘시대’(카이로스)의 비밀을 군중들에게 밝히 계시하셨다. 더구나 이 비밀들은 서기관이 율법을 가르치듯이 말씀되지 않았고 마치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 감동 속에서 진리를 선포하듯이 권위에 찬 음성으로 선언되었던 것이다.
36절, 강해 주석 해설
무리를 떠나사
KJV에 의하면 예수게서 무리들을 해산시킨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RSV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떠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이스’은 ‘아피에미’의 현재 수동형으로서, ‘가게 하다’(let go), ‘보내 버리다’(send away) 또는 ‘버려두다’(leave), ‘포기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께서 들을 귀와 볼 눈을 갖지 못한 많은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그의 비유속에 무엇인가가 숨기워져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앞서 떠났던(13:1)집으로 다시 돌아오셨음을 나타낸 장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36절 이후의 3개 혹은 4개의 비유들(보화, 진주, 그물, 서기관)의 청중들은 일반 무리들이 아닌 소수의 제자들로 바뀌었으며 비유의 목적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기 위해, 밝히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또한 알려진 천국 도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제자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촉구(促求)하기 위하여 베풀어졌다.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설명하여 주다’의 뜻인 동사 ‘디아사페손’ 은 ‘뚫다’, ‘통하다’의 의미인 전치사 ‘디아’과 ‘맑은’, ‘깨끗한’의 뜻인 ‘사페스’의 합성으로 되어진 말로서, ‘철저히 말하다’, ‘분명히 가르치다’ 또는 ‘밝히 말하다’의 의미이다. 한편 18:31에서 이 동사는 ‘낱낱이 고하다’(report)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아무튼 이 단어는 제자들이 예수의 비유 중 그 어느 하나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풀거나 해석할 수 없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어떻게든 예수의 말씀을 철저히 알기를 원했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신령한 말씀은 신령한 영의 도움으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겸손하고도 열정적으로 진리를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비밀스런 진리들을 가르쳐 주신다(10절).
37절, 강해 주석 해설
인자
복음서 중에 나타나고 있는 ‘인자’(the Son of Man)라는 표현들은 그 칭호와 관련된 주제에 따라 (1) 종말의 날에 영광 가운데서 임재하실 묵시적인 의미의 인자 (2) 고난받다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어가는 인자 (3) 현재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이 위탁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인자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본문에서의 씨 뿌리는 자로서의 ‘인자’의 의미는 세 번째 유형으로서 복음의 첫 선포자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참조, 누가복음 5장 주제 강해).
38절, 강해 주석 해설
밭은 세상이요
이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미칠 것을 암시한다. 이같은 사실은 본문의 헬라어 표현, 곧 ‘밭’과 ‘세상’이라는 명사 앞에 각각 동일한 관사(호)가 붙어 있음으로써 양자는 서로 위치를 바꾸더라도 의미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지나칠 정도의 출교(excommuication)를 강조하는 도나티스트들(Donatists)과 싸우기 위해 ‘밭은 교회’이며, 또한 그곳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표적’이라고 말한 어거스틴(Augustine)의 주장은 자신이 살던 시대 상황을 고려한 협의적(狹義的)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천국의 아들들
인자에 의해(37절) 이 세상에 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메시아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언약의 권리를 포기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인 ‘그 나라 자손들’(8:12)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으로 메시아의 왕국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백성들로서, 법적권리, 즉 상속권을 소유한 아들의 신분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5:9). 특히 ‘천국의 아들들’이란 히브리적 표현으로서 그들이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이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하나님과 그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이며 성령의 여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소유한 것을 가리킨다.
악한 자의 아들들
악한 자에 의해 세상에 흩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멸망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며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사악한 속성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사악한 근성을 가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39절, 강해 주석 해설
원수는 마귀요
‘원수’, ‘대적자’를 뜻하는 말인 ‘에크드로스’은 ‘적의’, ‘불화’, ‘이간’, ‘분리’를 가리키는 말인 ‘에크드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분리되어 나온 자’를 의미한다. 한편 마귀를 가리키는 말인 ‘디아볼로스’은 ‘사이에’를 뜻하는 ‘디아’과 ‘밀어넣다’, ‘끼어넣다’, ‘던지다’의 뜻인 ‘발로’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상(中傷)하는 자’, ‘비방, 거짓 고소하는 자’, ‘밀고자’의 의미이다. 따라서 원수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버린 자로서의 악의 기원과 그 정체성(正體性)을 나타내며, 마귀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를 조성(助成)하는 그들의 사악한 행위(work)를 드러내 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나간 자는 마귀의 역할, 즉 사악의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일을 담당한다(4장 강해 ‘사탄과 귀신’ 참조).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여기서 ‘세상 끝’ (쉰테레이아 아이오노스)이란 문자적으로 ‘이 시대의 완료(결말)’를 의미한다. 결국 이때가 이르면 현존하는 이 시간들이 완료되고 동시에 영광스런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때는 예언된 다니엘의 70이레(Seventy Weeks)의 끝(단 9:24-27, 계 11:1-13), 곧 예수의 재림의 때를 암시한다.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천사들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창 18:2-15, 출 3:2, 삿 13:6-21)을 하는 것으로서 묘사되었다. 그런데 신약에서,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중의 천사의 중대한 역할과 책임은 종말에 인자와 함께 세상에 와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며 악임을 멸망의 장소로 인도하여 영원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마 24:31, 25:31-46, 막 13:27, 계 14:17-20). 더 자세한 내용은 히 1장 강해 ‘천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40절, 강해 주석 해설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날 곧 종말에 있을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가라지(악한 자들)의 묶음이 영영한 멸망의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계 14:9-11). 이는 단지 상징적, 교훈적 차원에서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來世)를 가늠하는 존재론적 심판이다(42절).
41절, 강해 주석 해설
보내리니(아포스텔로)
‘앞’, ‘미리’, ‘전에’를 뜻하는 말인 ‘아포’과 ‘차례로 놓다’, ‘준비하다’의 뜻인 ‘스텔로’ 의 합성어로서, ‘사명을 띠고 목적한 장소로 가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위임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스톨로스’ 은 특별히 예수께서 선택하신 12제자를 일컫는 말로(10:2),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문의 천사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 나라에서
문자적인 의미는 ‘그의 왕국 안에서’(in his kingdom)의 뜻으로, 하늘 나라는 바로 아버지의 나라(the kingdom of the Father)이며, 인자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Man)로서 예수의 지상 사역(ministry)에 의해서 이미 시작된 종말의 나라이며 그의 뜻이 실현되고, 통치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분명 ‘그의 나라’는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Bornkamm). 왜냐하면 부활과 재림 이후의 예수의 통치 영역은 온 우주에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28:18).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 말은 습 1:3의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 이라는 원문을 완곡하게 번역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습 1:3에서의 ‘거치게 하는 것’은 주로 우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악에 빠져들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마태의 표현도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걸려넘어지게 하는 함정이나 미끼 또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악을 행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문자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7:23). 한편 바울은 불법의 사람을 가리켜 멸망의 아들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했는데(살후 2:3-4), 이는 그가, 곧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42절, 강해 주석 해설
풀무 불
이는 마태의 기록 중 본 절과 50절에만 언급된 말로서 직역하면 ‘화덕’,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가리킨다. 이는 하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무서운 불로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것은 흔히 ‘불못’ 또는 ‘지옥’으로도 일컬어지고 있다(렘 29:22, 단 3:6, 계 20:15, 에스드라서 7:36). 모든 불의한 것들이 징계되고 일소(一掃)되는 이곳에서 악인들은 종말적인 영원한 운명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울다’의 의미인 ‘클라우드모스’ 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哀悼)를 가리키는 말로 라마에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우는 것이나(마 2:18), 회당장의 집에서 훤화 하는 것(막 5:38) 등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를 갈다’, ‘이를 악물다’는 뜻인 ‘브뤼그모스’은 ‘물어 뜯다’란 뜻의 ‘브뤼코’에서 나온 말로 굶주림에 계속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모습이나, 분노로 씩씩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행 7:54에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를 갈거늘’ 이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43절, 강해 주석 해설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본문의 말씀은 단 12:3의 내용을 암시해주고 있으나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다니엘서의 기록과는 달리 ‘지혜있는 자들’(이해하는 자들, 호이수니엔테스)이란 말이 생략되고 단지 ‘의인들’ (호이 다카이오이)이란 말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수께서 그 당시 당신의 메시지를 지혜롭게 이해하는 자들이었던 제자들만을 이상화 시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의인들’이란 복음의 빛을 수용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의인들은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 곧 영원한 본향으로 삼고 있다.
해와 같이 빛나리라
여기서 ‘빛나리라’에 해당하는 ‘에크람프수신’ 이란 ‘ … 로부터’(from)의 뜻인 ‘에크’과 ‘등불’이란 뜻인 ‘람파스’이 합쳐진 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결국 의인들의 빛남이 마치 어둠가운데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밝히 볼 수 있게 하는 등불과 같이 빛나게 된다는 의미로 세상 끝날에 성도들이 덧입게 될 영광의 광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말이다. 한편 의인들의 해같이 빛나는 모습의 예표는 바로 변화산에서의 변형된 예수의 모습(17:2), 또는 예수의 무덤 속에 앉아있던 주의 천사의 모습(28:3)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모든 만물이 다 해처럼 빛날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던 처음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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