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목요일의 매일성경 묵상 본문인 말라기 3:13-4:6에서 우리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당장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이름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과 보상을 깊이 묵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3장 13절-4장 6절,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누리는 가치와 보상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175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
- 새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서론 및 핵심 내용
오늘 본문인 말라기 3:13-4:6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주장하는 교만한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특별한 보배로 여기시며, 의의 태양으로 오셔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본론 및 배경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했고,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으며,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고 이혼이 만연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불평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악인들이 번영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헛되지 않다
말라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14절입니다.
말라기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말라기가 말한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שַׁו’(샤브)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십계명의 제3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한 단어인 “망령”이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단순히 '무가치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모욕하는 심각한 영적 불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유익”(בֶּצַע, 베짜)이라는 단어는 고대 근동의 상업 문화에서 '이익'을 뜻하는 단어로, 직물을 짜서 자르는 행위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오늘날 조직폭력배가 자신의 '몫'을 강제로 요구하고 빼앗는 것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러한 불신앙적 태도는 욥기에서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순한 거래 관계로 격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한국 교회의 MZ세대의 이탈 현상의 핵심에는 '실용주의적 신앙관'이 자리잡고 있다는 조사 보고 자료가 있습니다. MZ 세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며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신앙의 본질을 오해한 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이나 신약의 스데반처럼, 진정한 믿음은 당장의 보상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었고, 현대에도 고난받는 교회들이 오히려 더 순수한 신앙을 지켜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기념책에 기록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헛되지 않음을 선언한 말라기는,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기념책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16절입니다.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선언 속의 “경외”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레'(יָרֵא)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원 뜻은 단순한 감정적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전인격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레위기 19:14에서는 이 경외심이 이웃 사랑의 동기가 되고, 신명기 17:19에서는 지도자의 통치 원리가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경외심은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지켜 나가는 핵심 가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사자굴이나 풀무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지하 카타콤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러한 '하나님 경외'야말로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예전에 시리아의 한 기독교 공동체는 IS의 위협 속에서도 매주 지하교회로 모여 예배드리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의 예배는 기쁨이 넘치며, 오히려 박해가 믿음을 더욱 순수하게 만든다고 고백합니다. 한국교회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이러한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교제는 단순한 친목이 아닌,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영적 결속체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이름이 기념책에 기록된다고 말한 말라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말라기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특별한 소유'를 뜻하는 히브리어 '스굴라'(סְגֻלָּה)는 고대 근동에서 왕의 개인적 보물을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였습니다. 출애굽기 19:5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중에서 나의 특별한 소유가 되리라"고 하신 것도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신약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그의 소유된 백성"(엡 1:14, 벧전 2:9)이라고 부른 것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구약에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의 왕실 보물을 아낌없이 드린 것처럼(대상 29:3),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구속사라 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였던 고멜을 값을 치르고 다시 사온 것처럼(호 3:2),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과거에 터키에서 있었던 대지진 당시, 한 아버지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자신의 어린 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로 삼아 목숨을 바친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진 바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도 딸을 보호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 아버지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소유물이 아닌, 자신의 생명과 바꿀 만큼 귀한 보배로 여기고 계십니다. 이사야도 "내가 너를 눈동자 같이 지키며"(사 49:16)라고 이 구원의 진리를 노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말라기는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록 당장의 보상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기억하시며 특별한 보배로 여기십니다. 그날이 이르면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실 것입니다.
함께 하는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보배로 여기시고 기억하시니 감사합니다. 당장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섬기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끝까지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 한국교회가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소서.
- 날마다 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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