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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1장 1절-13절, 여호와의 날에 누가 설 수 있습니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9월 10일의 매일성경 큐티 본문은 스바냐 1장 1절-10절로, 안일함에 잠든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경고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영적 안일함과 세상의 소음 속에 잠든 신앙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깨닫습니다. 찌꺼기 같이 가라 앉은 거짓 믿음에서 벗어나,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함께 나눕니다.


스바냐 1장 1절-13절, 여호와의 날에 누가 설 수 있습니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스바냐 1장 1절-13절, 여호와의 날에 누가 설 수 있습니까?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 새 찬송가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



서론: 깨어남을 향한 첫걸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 왕국의 역사상 가장 캄캄했던 시절, 히스기야 왕의 신앙을 뒤로하고 그의 아들 므낫세와 손자 아몬이 57년간 나라를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물들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는 제단이 성전 안에까지 세워졌고, 백성들의 삶은 포악과 거짓으로 가득 찼습니다. 바로 이 영적 폐허 속에서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요시야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를 둘러싼 죄악의 문화와 타락한 유산을 거부하고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거대한 물결을 거스르는 의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증후군’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갑자기 넣으면 즉시 뛰쳐나오지만, 차가운 물에 넣고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안주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점진적인 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치관과 죄악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약간의 타협, 기도 없는 습관적인 신앙생활,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의 뜨거움을 잃어버린 미지근한 상태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시야처럼 부패한 시대를 거슬러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영적 안일함이라는 따뜻한 물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인가. 오늘 스바냐의 말씀은 이 갈림길에 선 우리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경종입니다.



본론: 심판의 경고가 울려 퍼진 시대


스바냐 선지자는 바로 이 요시야 왕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예언이 요시야 왕이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이전에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현손, 즉 왕의 후손이었던 스바냐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었습니다. 57년간 굳어버린 유다 백성의 마음을 깨뜨리고, 다가올 개혁의 땅을 기경하는 하나님의 선제적인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선언하시기 전에 먼저 선지자를 통해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스바냐의 경고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간절한 초청장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외침은 유다의 양심에 위기감을 불어넣었고, 훗날 요시야가 발견한 말씀이 백성의 심장을 꿰뚫는 칼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작업이었습니다.


1. 잠잠히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하라

오늘 본문 7절은 충격적인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여기서 ‘잠잠할지어다’의 히브리어 원어 ‘하스’(הָס)는 평화로운 침묵이 아니라, 재판장이 법정에 들어설 때 모두가 숨을 죽이는 것과 같은 긴급하고 경외심 가득한 침묵, 즉 “조용히 하라!”는 외침에 가깝습니다. 하박국 선지자 역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라고 외치며, 창조주 앞에서 모든 피조물이 침묵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침묵의 이유는 더욱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를 준비하셨는데, 그 제물이 양이나 소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 유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에 초청받은 손님은 그들을 멸망시킬 바벨론 군대입니다. 언약 백성이었던 그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려, 예배의 주체에서 심판의 제물이 되어버린 끔찍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세상이 경제 위기나 재난에 대한 전문가들의 수많은 경고를 무시하고 ‘설마 괜찮겠지’ 하다가 결국 큰 재앙을 맞는 것처럼, 유다 백성 역시 선지자들의 외침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잠잠하라!”는 명령은 더 이상의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멈추고, 임박한 심판의 실체를 직면하라는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2. 영적 안일함이라는 깊은 잠

하나님께서 가장 무섭게 심판하시겠다고 지목한 대상은 누구입니까? 12절 말씀입니다.

  • 스바냐 1: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찌꺼기 같이 가라앉았다’(הַקֹּפְאִים עַל־שִׁמְרֵיהֶם, 하코프임 알-쉬므레이헴)는 표현은 포도주를 빚는 과정에서 나온 비유입니다. 좋은 포도주는 찌꺼기를 걸러내야 맑고 깊은 맛을 내지만, 찌꺼기 위에 오래 방치된 포도주는 혼탁해지고 맛이 변질됩니다. 이는 영적으로 게으르고 무감각해져 버린 신앙 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대한 기대도 없으며, 그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한 신앙. 이러한 영적 침체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 즉 ‘실천적 무신론’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분이 내 삶에 아무런 상도 벌도 주지 않는 무관심하고 무능력한 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미지근함은 주님을 역겹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등불을 들고서라도 이런 영적 안일에 빠진 자들을 구석구석 찾아내어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일상 속 예화로 비유하자면, 건강을 위해 큰맘 먹고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고 비타민을 잔뜩 사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운동하고 비타민도 챙겨 먹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은 뒷전이 되고 비타민은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됩니다. 건강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건강을 향한 열정과 실천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회원권’은 있지만,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멈춰버린 상태 말입니다.


3. 진노에서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

스바냐가 선포한 ‘여호와의 날’은 모든 인간이 결국 마주하게 될 최후의 심판을 예고합니다. 그렇다면 이 무서운 진노의 날에 누가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이 절망적인 질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신약 성경에 있습니다. 로마서 5장 9절 말씀이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줍니다.

  •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첫째, 우리는 본래 스바냐가 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죄인입니다. 둘째, 그런 우리가 아무런 공로 없이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셋째, 이 모든 것은 오직 ‘그의 피’, 곧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으셨기에, 그분 안에 피하는 자는 안전합니다.

오늘 말씀을 붙들고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원합니다. 이번 한 주, ‘영적 건강검진’을 위해 의식적으로 10분의 시간을 내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주님, 제 마음속에 굳어버린 찌꺼기는 무엇입니까? 제 삶의 어떤 영역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렸습니까?”라고 솔직하게 여쭙고 성령의 빛으로 내면을 비춰달라고 간구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스바냐 1장 1절-13절, 여호와의 날에 누가 설 수 있습니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결론: 심판의 날을 소망의 날로


오늘 우리는 스바냐의 경고를 통해 영적 안일함에 빠진 유다 백성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날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심판의 메시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기신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피할 곳 없는 인생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피난처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스바냐의 이름이 예표하는 궁극적인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숨겨주시고, 모든 진노로부터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잠든 자에게 ‘여호와의 날’은 두려운 심판의 날이지만, 깨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에게 그날은 영광스러운 구원과 소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부디 안일함의 잠에서 깨어나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굳게 붙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영적 안일함에 빠져 주님을 멀리했던 저희의 죄를 고백합니다. 말씀의 경고로 저희를 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오니, 성령의 불로 저희 마음을 다시 뜨겁게 하사 주님 오실 날을 소망으로 기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세상의 소음을 끄고 주님의 음성만 듣게 하소서.
  • 안일함에서 깨어나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게 하소서.
  • 날마다 십자가 은혜를 붙들고 승리하게 하소서.
  •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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