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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3장 1절-8절, 공의의 빛, 부패한 성을 심판하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9월 13일의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스바냐 3장 1절-8절은, 부패하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침묵하시는 듯이 보이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아침마다 빛을 비추시듯 부패한 세상에 비추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참된 소망과 은혜를 발견하고 설교문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스바냐 3장 1절-8절, 공의의 빛, 부패한 성을 심판하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스바냐 3장 1절-8절, 공의의 빛, 부패한 성을 심판하다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 새 찬송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



서론: 무너진 신뢰, 외면당한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아이부터 가축까지,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남기지 말고 없애라는 단호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가장 좋고 기름진 양과 소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이 그의 불순종을 책망했을 때, 사울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그러면서 남겨둔 가축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을 ‘제사’라는 거룩한 종교 행위로 포장하려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전리품을 탐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그 탐욕을 경건의 모양으로 감추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무서운 죄는 노골적인 반항이 아니라, 거룩의 옷을 입고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도자들의 부패와 위선에 대한 소식을 너무나 자주 접합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우리 사회가 부패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정치인과 공직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공의와 정의의 구호가 공허하게 들릴 때, 우리는 깊은 실망과 냉소에 빠지게 됩니다. 지도자의 위선은 단순히 개인의 윤리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독소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시대, 겉으로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지만 속으로는 지도자들의 탐욕과 위선이 곪아 터지고 있던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배경과 본문: 개혁의 시대에 울리는 심판의 경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다 왕국의 선한 왕, 요시야 시대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요시야 왕은 할아버지 므낫세의 오랜 우상숭배로 영적 암흑기에 빠졌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을 제거했으며,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의 말씀을 따라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만 섬기기로 언약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유다는 영적인 부흥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그 예루살렘 성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십니다. 왜 부흥의 시대에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었을까요? 그것은 요시야 왕의 개혁이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교훈을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개혁에 동참하는 척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옛 죄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종교적인 행위나 외적인 변화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진실하게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종교 활동은 요시야 시대의 무늬만 개혁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1. 책임을 망각한 지도자들의 탐욕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타락이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3절과 4절은 사회의 네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방백,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이 어떻게 자기 본분을 잊고 타락했는지를 생생한 동물 이미지로 고발합니다.

  • 스바냐 3:3-4,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방백들은 백성을 지키는 목자가 아니라 그들을 착취하는 ‘부르짖는 사자’와 같았습니다. 재판장들은 공의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빼앗아 아침이 되면 뼈도 남기지 않는 탐욕스러운 ‘저녁 이리’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하여 돈과 권력에 아부하는 거짓 예언을 일삼았고, 예배를 주관해야 할 제사장들은 오히려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며 영적 타락을 주도했습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붕괴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몇 년 후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 문 앞에서 외쳤던 ‘성전 설교’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죄를 회개하는 장소가 아니라, 죄를 짓고 와서 숨는 ‘도둑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유명한 식당의 주방장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뛰어난 요리 실력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뒤에서는 원가를 아끼기 위해 유통기한이 지난 식자재를 몰래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지만, 결국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병들고 진실이 밝혀지자 그의 식당은 문을 닫고 명성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의 실력은 진짜였지만, 정직함이 없었기에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명성과 성전이라는 화려한 외형을 가졌지만, 그 속은 탐욕과 불의로 썩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그 부패의 실상을 드러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2. 매일 아침 비추는 공의의 빛

이처럼 어두운 인간의 부패와는 정반대로, 5절은 하나님의 성품을 찬란한 빛으로 묘사합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스바냐 3: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 히브리어로 ‘차디크(צַדִּיק)’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침 해가 어김없이 떠오르듯, 매일 아침 자신의 공의, 즉 ‘미쉬파트(מִשְׁפָּט)’를 세상에 비추셨습니다. ‘미쉬파트’는 단순히 심판을 넘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통치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매일 아침, 자신의 의로운 기준을 보여주시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치 모든 교차로의 신호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자신만은 그 법을 무시하고 역주행하며 질주하는 운전자와 같았습니다. 교통 법규가 우리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듯,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 영혼이 살고 공동체가 번성하기 위한 생명의 질서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이 생명의 질서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파멸뿐이었습니다.


3. 십자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교차점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이토록 완벽하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죄인들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스바냐의 예언만 보면 탈출구는 없어 보입니다. 그 해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로마서 3장 26절은 이 신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로마서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죄를 결코 눈감아 주실 수 없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예루살렘이 받아야 할 진노, 그리고 오늘 우리가 받아 마땅한 모든 죄의 형벌은 반드시 쏟아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진노의 잔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부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불의를 대신 짊어지셨고, 하나님의 공의는 남김없이 만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셨기에 여전히 ‘의로우시며’, 동시에 그 아들을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용서하고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피하기 위해 사랑을 택한 사건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공의를 완벽하게 만족시킨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은 ‘수치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살 길은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양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한 가지를 실천합시다. 이번 한 주간, 매일 아침 단 1분만 ‘영적 정직함 점검’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잠시 멈추어 성령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 마음속에 위선은 없습니까? 저의 말과 행동이 다른 부분은 없습니까?” 그리고 죄가 생각날 때 즉시 자백하고,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용서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으십시오. 이 작은 실천을 시작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완악함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절-8절, 공의의 빛, 부패한 성을 심판하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결론: 심판을 넘어, 소망의 남은 자로


오늘 본문의 마지막 8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온 땅에 분노를 쏟으시는 그날을 기다리라는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두려운 명령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심판받을 악인들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신음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갈망하는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공포의 날이 아니라 마침내 모든 것이 바로잡히는 정의의 실현, 즉 신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부패한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아니라, 이 시대의 신실한 남은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심판받으신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정직과 공의의 삶을 살아내는 자들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주님을 기다립니다. 죄를 불꽃같은 눈으로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당신의 보배로운 자녀 삼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을 붙들고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하는 기도


의로우신 하나님,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랐던 위선을 회개합니다. 죄를 미워하시되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공의를 이루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세상의 불의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가게 하소서.
  •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여 정결한 삶을 살게 하소서.
  • 십자가 사랑을 의지하여 오늘을 승리하게 하소서.
  •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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