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의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에스라 4장 1-10절은, 부흥의 소망을 품었던 포로 귀환자들이 낙심하며 성전 건축을 멈추게 된 사건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대적들은 성전 건축의 시작부터 '함께 짓자'라는 교묘한 유혹과 '낙심' 시키는 방해로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스룹바벨은 '거룩한 거절'을 하였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함을 확인하였습니다.
에스라 4장 1절-10절, 보이지 않는 전쟁, 성전을 세우라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347장, 허락하신 새 땅에
- 새 찬송가 350장, 우리들이 싸울 것은
서론: 거룩한 열심 뒤에 찾아오는 것
여러분, 혹시 새로운 결심을 하고 큰 은혜를 받아 "이제 정말 주님 뜻대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한 직후에, 이상하게도 더 큰 어려움이나 예상치 못한 방해에 부딪혀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새해 첫날 금연을 결심했는데, 바로 다음 날 가장 친한 친구가 찾아와 담배를 건네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딱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70년간의 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스라 3장을 보면, 그들은 무너진 터 위에 다시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찬양하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3:11-13). "드디어 다시 시작이다! 하나님의 집이 다시 세워진다!" 그런데 그 감격과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오늘 4장 1절, 그들에게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1절).
본론
가장 은혜로울 때, 가장 거룩한 일을 시작할 때, '대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적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대가 없기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거룩한 사명에는 반드시 영적 방해가 따른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이 방해 앞에서 너무 쉽게 낙심하고(v. 4), 심지어 적과 아군을 분별하지 못하고 타협하려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우리에게 대적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해야 하는지 함께 나누겠습니다.
1. 함께 짓자는 교묘한 유혹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보면, 대적은 '동역자'의 모습으로 다가옴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 에스라 4: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대적"이라고 불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찾아와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이 얼마나 달콤한 제안입니까? 안 그래도 인력도 부족하고 재정도 부족한데, '우리도 돕겠다'니, '우리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니, 이보다 더 좋은 동역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치명적인 '독이 든 사과'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열왕기하 17장을 보면, 그들은 앗수르의 혼합 정책으로 예루살렘 북쪽에 강제 이주된 이방 민족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도 섬기고, 자기들이 가져온 우상도 '함께' 섬겼습니다(왕하 17:33).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여호와도 섬긴다'는 혼합주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스룹바벨이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전은 빨리 지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성전은 처음부터 우상 숭배의 독이 섞인, 거룩하지 못한 성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탄의 가장 교묘한 전략은 겉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들어와 본질을 흐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함께 짓자'고 유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리를 조금 양보하라는 세상의 목소리입니까?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세워갈 때, '효율성'이나 '숫자' 때문에 거룩함의 기준을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적은 언제나 '함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순수성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2. 거룩한 분별력과 단호한 거절
그렇다면, 함께 짓자는 교묘한 유혹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룩한 분별력'으로 타협을 거절해야 합니다. 이 교묘한 제안에 대한 지도자들의 반응을 3절에서 보십시오.
- 에스라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어찌 보면, 굉장히 차갑고 단호한 거절입니다.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대답은 배타적인 태도나 옹졸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분별력'입니다. 스룹바벨은 이 제안이 '도움'이 아니라 '훼방'임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들은 타협하는 대신,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3절) 그들의 기준은 '효율'이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고레스 칙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탄이 찾아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 4:3)이라며 교묘하게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으시고 "기록되었으되"라며 오직 '말씀'으로 대적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막아설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라며 단호히 꾸짖으셨습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타협하여 쉬운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거룩한 무례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의 신앙, 우리 가정의 신앙, 우리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No"라고 말해야 합니까?
3. 노골적인 방해와 지속적인 고발
대적은 유혹이 통하지 않으면 '노골적인 방해'로 전략을 바꿉니다. 거절당한 대적들의 본색이 4절과 5절에 드러납니다. 4절만 함께 읽겠습니다.
- 에스라 4: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함께 짓자'던 그들이, 거절 당하자 이제는 '짓지 못하게' 온 힘을 다해 방해합니다. 그들의 전략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내부 교란 (v. 4)입니다. 백성들의 "손을 약하게 했다" (רָפָה, '라파'). 즉, "저렇게 방해하는데 되겠어?", "해봤자 소용없어"라는 말을 퍼뜨려 백성들을 '낙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역을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길은 리더와 공동체의 마음을 낙심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외부 압박 (v. 5)입니다. 대적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고발하고(v. 5), 아하수에로 왕, 아닥사스다 왕 때까지(v. 6-10) 집요하게 고발장을 올립니다. 6절의 '고발'은 히브리어로 '시트나(שִׂטְנָה)'인데, 이는 '사탄(שָׂטָן)'과 같은 어근입니다. 그들의 방해는 단순한 민원이 아니라, '사탄의 일'이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방해는 결국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일로 인해 성전 건축은 약 16년간 중단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한 낙심(비난, 조롱)과 고발(정치적 모함)을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분의 사역을 완전히 끝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모든 고발과 방해를 무력화시키셨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방해를 뚫고 부활하심으로, 그 어떤 대적도 무너뜨릴 수 없는 영원한 성전, 곧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사람들이 나를 낙심하게 합니까? 억울한 고발이나 비난에 부딪힙니까?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의 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영적 대적의 방해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방해는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16년 중단되었지만, 결국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격려로 다시 시작되어 '반드시' 완공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사람이 시작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미 승리한 전쟁, 성전을 세우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성전을 세우려 할 때, 대적은 세 가지 모습으로 방해했습니다. '함께 짓자'는 교묘한 타협과, 타협이 안 되자, '손을 약하게 하는' 내부적 낙심 그리고 집요하게 '고발하는' 외부적 압박 (v. 5) 등입니다.
이것이 2,500년 전 스룹바벨 시대만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오늘날 참된 성전인 우리 자신(고전 6:19)과 우리 공동체(교회)를 거룩하게 세워가려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결단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싸움을 이기신 우리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탄의 모든 유혹(타협)과 고발(압박)과 죽음의 위협(낙심)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혹시 지금 '함께 짓자'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습니까? "상관이 없느니라"고 선포할 용기를 성령께 구하십시오. 혹시 사람들의 말에 '손이 약해져' 낙심하고 있습니까?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손을 다시 붙들어 주시길 기도하십시오. 혹시 억울한 고발과 방해로 사역이 중단된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을 신뢰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적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담대하게 여러분의 삶의 성전, 가정의 성전, 우리 교회의 성전을 거룩하게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하는 기도
사랑의 주님, 결단을 했지만 사탄의 방해에 쉽게 낙심하고 거짓과 타협하려 하였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탄의 거짓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깨어 있는 마음과 분별하는 지혜로 사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한 분별력과 결단력을 주소서.
- 방해 앞에서 낙심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
- 우리 가정과 교회를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 주소서.
-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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