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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9장 9절-15절, 불쌍히 여기시고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11월 14일의 매일성경 큐티 본문은 에스라 9장 9절-15절로, 하나님의 긍휼과 소생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반역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에스라의 기도 내용입니다. 그들은 왜 죄를 반복했으며, 또 오늘 우리는 왜 심판을 알면서도 죄를 계속해서 반복할까요? 에스라의 처절한 회개 기도는 "우리는 감히 설 수 없다"는 절망에 이릅니다. 이 절망 속에서 '설 수 없는 우리'를 '서게 하시는'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복음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라 9장 9절-15절, 불쌍히 여기시고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에스라 9장 9절-15절, 불쌍히 여기시고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 새 찬송가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서론: 은혜를 잊는 사람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헬스장에 등록합니다. 그러나 2월만 되어도 헬스장은 다시 한산해진다고 합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연약할까요? 왜 그렇게 뜨겁게 결심했던 것을 쉽게 잊어버릴까요?

그런데 이 '작심삼일'이 단순히 의지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관계된 문제라면 어떨까요? "하나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눈물로 기도했던 그 죄를, 오늘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에스라가 그랬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는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말씀'이 무너진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주한 현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먼저 돌아온 백성들이, 오히려 그 땅의 이방 민족들과 똑같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통혼하며 영적으로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이 죄(이방 민족과의 통혼)는 과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바로 그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돌아온 땅에서, 그들은 멸망의 원인이었던 그 죄를 정확하게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9절부터 그의 처절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 기도는 남을 정죄하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이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고도 또 넘어지는 우리의 모습과, 그럼에도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1. 잊혀진 은혜, 기억해야 할 긍휼

에스라는 기도를 시작하며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합니다. 9절입니다.

  • 에스라 9: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에스라는 9절을 통하여 세 가지 놀라운 은혜를 고백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때문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버려져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헤세드, חסד)을 베푸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은 영적인 죽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성전에 '말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광야에서 텐트를 단단히 고정하듯,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단단히 고정시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받은 은혜와 같습니다. 우리도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교회)에 '견고한 말뚝'으로 박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2. 반복되는 죄악, 무뎌진 마음

그런데 에스라의 기도는 감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 에스라 9: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9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했는데, 10절에서 '우리'는 그 계명을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대조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13절과 14절입니다.

  • 에스라 9:13-14,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모습입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이 벌을 '가볍게'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자신들의 죄는 '전멸' 당해도 마땅한데,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남겨'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계명을 거역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벌을 안 받은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고도, 심지어 그 벌이 내 죄보다 '가벼웠음'을 알고도, 또다시 그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나님이 이번에도 용서해 주시겠지.'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값싼 은혜로 만듭니다. '죄악보다 벌을 가볍게 하시는' 그 은혜를, 또 다른 죄를 짓는 방종의 기회로 삼습니다. 에스라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무서운 죄임을 알았습니다.

3. 설 수 없는 죄인, 의로우신 하나님

이제 에스라는 마지막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두 가지만 선포합니다. 15절입니다.

  • 에스라 9: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는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에스라는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남아서 피할 수 있었던 것'(소생한 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죄를 지은 이 상태로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설 수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회개 앞의 인간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나는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 모든 결심, 모든 선행으로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설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합니다. 에스라가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라고 절규했던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진노'(14절)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그 '의로우신' 심판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2절은 선포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는 설 수 없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에스라 9장 9절-15절, 불쌍히 여기시고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결론: 은혜 위에 다시 서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9절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로 '소생' 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뚝'에 우리를 단단히 박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0절과 14절의 죄인들입니다. 그 은혜를 알고도, 또다시 그 죄를 반복하는 절망적인 죄인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혹시 반복되는 죄악 때문에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습니까? 그 절망의 자리가 바로 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의로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15절의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을 여셨습니다.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고백했던 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성령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죄인인지, 그리고 그 죄를 덮는 은혜가 얼마나 더 큰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히 설 수 없는 우리"를 "담대히 서게 하신"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하는 기도


의로우신 하나님, 주신 긍휼과 소성의 은혜를 잊고 또다시 죄를 반복해 온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용서하옵소서. 우리가 받아야 할 벌보다 가볍게 하시고, 감히 주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마음에 품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은혜를 잊고 반복하는 죄를 깨닫고 애통할 마음을 주소서.
  • '설수 없는 나'를 '서게 하신' 십자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 이 땅에서 구별된 '남은 자'로 살게 하소서.
  •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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