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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묵상] 요한복음 5장 1절-15절,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2월 13일 묵상] 요한복음 5장 1절-15절,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함께 할 찬송


  • 새 찬송가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 새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서론: '로데발'에서 '베데스다'까지 찾아오시는 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데스다' 연못가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묘사하는 베데스다의 풍경은 이름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곳은 자비가 흐르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를 짓밟고 먼저 들어가야만 살 수 있는 '무한 경쟁의 현장'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대할 때면 우리는 구약의 한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사울 왕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입니다. 그는 두 발을 다 절며 '로데발'(로드발), 즉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숨어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왕의 식탁에 나갈 자격도, 힘도 없던 그에게 다윗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찾아냅니다. 므비보셋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왕이 베푸는 '언약적 자비(חסד)'를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38년 된 병자 역시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로데발'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므비보셋처럼 스스로 움직일 힘이 없었고, 그를 도와줄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라는 그의 탄식은 오늘날 치열한 세상 속에서 "도와줄 이 하나 없다"고 느끼며 고립된 우리의 고백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이 새벽, 므비보셋을 찾았던 다윗처럼, 절망의 자리에 누워 있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 없음'을 먼저 아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가슴 뭉클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 요한복음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명절의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곧장 향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소외된 자들이 모여 있는 양문 곁 베데스다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주님의 시선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오래된 병자인 '38년 된 이 사람'에게 머물렀습니다.

사실, 38년은 긴 세월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하며 불순종의 세대가 다 죽기까지 걸린 상징적인 시간(신명기 2:14)이기도 합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완전한 무력함'과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의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이 내 고통에 무심하시다고 느낍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이 기도를 해왔는지, 내 마음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주님은 아실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은 이미 보고 계시고, 이미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새벽마다 쏟아내는 눈물자국과 그 마음의 깊은 흉터를 주님은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의 길이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2월 13일 묵상] 요한복음 5장 1절-15절,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2. 핑계의 자리를 박차고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주님의 질문은 당혹스럽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38년 된 병자에게 이보다 당연한 질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질문 앞에 병자는 "네, 낫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 요한복음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의 대답 속에는 원망과 핑계가 가득합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남들이 나보다 빠릅니다." 그는 치유의 주권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물'이 움직이는 요행과 '나를 도와줄 힘 있는 사람'에게 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돈만 있으면", "환경만 받쳐주면", "누가 나를 좀 밀어만 주면" 내 인생이 풀릴 텐데 하며 환경의 감옥에 갇혀 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환경을 바꿔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 물을 흔들어주지도 않으셨고, 그를 물속에 밀어 넣어줄 건장한 청년을 고용해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진정한 기적은 환경이 개선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보다 크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시작됩니다. 병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38년 동안 자신을 옥죄었던 '남 탓'과 '환경 탓'의 들것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새벽,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못 한다"는 핑계의 자리를 주님의 말씀으로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3. 진정한 안식은 육신의 회복을 넘어 거룩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후, 예상치 못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고통받던 형제가 치유되었다는 기쁨보다, 자신들이 만든 종교적 규칙이 깨진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없는 종교의 냉혹함입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처음에 자신을 고친 분이 누구인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4절에서 성전에 있는 그를 다시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 요한복음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의 목적은 단순히 다리 근육을 살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는 죄의 종노릇 하지 않는 '진정한 안식'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육신의 치유는 '표적(Sign)'일 뿐입니다. 그 표적이 가리키는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의 구원과 거룩'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곤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건강해진 다리로 죄를 짓는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전으로 나아가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나를 낫게 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께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2월 13일 묵상] 요한복음 5장 1절-15절,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결론: 이제 당신의 들것을 들고 증언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38년 동안 병자를 짓눌렀던 '들것'은 절망과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자, 그 들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승리의 전리품'이자 '증거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누가 너를 고쳤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결국 예수님을 증언합니다(15절).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지고 나온 그 무거운 삶의 무게, 질병의 고통, 관계의 깨어짐이 이제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치유받아 세상 앞에 보일 강력한 간증의 제목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네 힘으로 물속에 들어가려 하지 마라. 내가 이미 너를 찾아왔다. 이제 나를 믿고 일어나 걸으라!" 이 음성에 반응하여, 오늘 하루를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병자가 아닌 사명자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함께 하는 기도


사랑의 주님, 38년 동안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절망 속에 누워있던 병자를 찾아가신 것처럼, 오늘 이 새벽 주님 앞에 엎드린 우리를 만나 주옵소서. 환경 탓, 사람 탓만 하던 우리의 입술을 닫게 하시고,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에 반응하여 우리 삶의 무거운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환경과 사람을 탓하고 불평하는 입술을 멈춰 주소서.
  • 주의 말씀을 듣고 즉시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 거룩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하루가 되게 인도해 주소서.
  •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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