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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6장 1절-15절, 물러서지 않는 신앙 - 매일성경큐티 주석과 해설 정리

매일성경큐티의 본문인 다니엘 6장 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은, 시기하는 대적들의 모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신앙을 지킨 다니엘에 관해 말합니다. 그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전에 하던 대로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였음을 묵상하고 주석과 해설을 정리합니다.


다니엘 6장 1절-15절, 물러서지 않는 신앙


다니엘 6장 1절-15절, 물러서지 않는 신앙



1절, 주석과 해설


6장의 개요

사자 굴에 던져지는 다니엘의 이야기는 3장에서 다니엘의 친구들만 시험을 받은 것과 비교되는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3장의 시험에서 다니엘이 제외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니엘은 6장의 시험에서 그의 친구들이 당했던 시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험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3장의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니엘을 사자 굴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지 않고, 들어간 후에 극적인 개입을 통하여 구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시험에 이렇게 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출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섭리와 뜻에 따라 이 땅에서의 삶을 일찍 끝나게 하시기도 하신다(빌 1:20-21).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에서 조금 오래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죽는 것도 유익한 것이다.

이 장에서 일어난 사건의 분명한 연대는 나와 있지 않으나 바벨론의 멸망(B.C. 539) 이후 1-2년 이내에 일어난 것은 확실하다. 다니엘은 이때 약 85 세의 노인이었다. 그의 경험은 노인으로서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을 기억하게 한다(계 1:9). 본 장은 이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바벨론이나 메대 바사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수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관

이 고관들은 제국의 도를 다스리는 ‘총독 또는 지사’(satrap)였다.



2절, 주석과 해설


총리 셋

‘총리’는 아람어로 ‘사르킨’인데, ‘총리, 지사, 대통령’을 뜻한다. 아마도 지금의 총리급 관직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세 명의 총리가 있는 행정 체제는 성경 외의 자료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니엘

이 장에서는 다니엘의 바벨론 이름이었던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고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은 다니엘서에 모두 10 번 나오는데 6장 이후에는 한 번만 나온다(단 10:1).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는 이름보다 원래 이름이었던 다니엘을 더 좋아한 것이 틀림없다.


손해가 없게 하려 함

이것은 세금을 정기적으로 거둬들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라 4:13).



3절, 주석과 해설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다니엘은 참으로 어떤 환경에서나 누구에 의해서나 언제나 출중하였다. 왕들에 의해서도(단 4:9, 5:11, 6:3), 동료 선지자에 의해서도(겔 14:20), 심지어 원수들에 의해서도(단 6:4) 그는 언제나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를 입었기 때문이었다(단 9:23).

“마음이 민첩하다”는 말은 아람어로 ‘루아흐 얏티라’인데 ‘탁월한 영(靈)’(an excellent spirit)이 있다는 뜻이다.

“다니엘에게는 탁월한 영이 있어서 다른 총리들이나 총독들보다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온 왕국을 다스리게 할 계획이었다.”(단 6:3, 바른성경)

그러므로 다니엘이 뛰어난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느부갓네살도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단 4:8-9).

요셉도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창 41:38).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다니엘에게 주려고 했던 지위는 세상적으로 누구나 동경하고 얻고자 애쓰는 것이었지만 결코 편안한 지위가 아니었다. 세상의 지위는 높으면 높을수록 그 자리를 탐하는 대적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지만, 결코 추구할 것은 아니다.



4절, 주석과 해설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그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정치인이 아닌가? 그런데 이 정신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다. 그들의 아버지가 마귀이기 때문이다(요 8:44). 그래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없는 곳에는,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온갖 권모술수(權謀術數)와 상대방을 죽이려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예로부터 내려오는 견해에 의하면, 다니엘은 뇌물을 받거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욕을 챙기는 일은 전혀 하지 않은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이었다.

그는 80대 중반의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잘못이나 흠을 찾을 수 없도록 유능하게 국사를 수행했다. 그런 업적은 그의 개인적인 성실함과 하늘 아버지의 끊임없는 지도하심을 의뢰한 결과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그에게는 생명 그 자체보다 중요했다. 젊어서부터 건강법칙을 세심하게 지킨 것이 분명히 동년배의 다른 사람들을 훨씬 능가하는 활력을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5절, 주석과 해설


하나님의 율법

여기서 ‘법’은 아람어로 ‘다트’인데, 히브리어 ‘토라’와 상응(相應)한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모세오경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차적으로는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적 삶을 뜻한다. 이 말은 본 장에서 핵심 용어이다. 다니엘은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온전히 충성하였고, 대적들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 다니엘의 대적들은 그가 바벨론의 신전에서 경배하는 모습을 어디서도 볼 수 없었고, 이방 종교의 의식에도 전혀 참가하지 않았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매주 쉬는 날로 규정된 안식일마다 그가 결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은 그가 기도를 위해 정해 놓은 시간이 그의 공무 집행을 방해한다고 추정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니엘의 종교 생활을 침해하는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대쟁투의 핵심도 사람의 도덕적인 생활에 있지 않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도덕적인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도덕적으로 너무 완전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다니엘도 아무 허물이 없었기 때문에, 즉 도덕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마지막 대쟁투의 핵심은 경배에 대한 것이다. 특별히 중요하게 보이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보이는 경배의 날에 대한 것이다. 안식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안식일 준수는 일반적으로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토요일을 예배일로 지키느냐, 일요일을 지키느냐의 문제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표가 되고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도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6절, 주석과 해설


총리들과 고관들이

제국의 모든 고관들이 왕 앞에 모인 것은 아니다. 분명히 다니엘의 지위를 시기하는 자들만 모였을 것이다. 만일 그 때에 모든 방백을 소환하였는데 다니엘만 그들 가운데 있지 않았다면 왕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일치하여 나아오다’, ‘떼를 짓다’를 의미한다. 대개의 경우 의인들은 소수(少數)이고, 악인들은 그 수가 많다. 악인들은 평상시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가도 의인들을 대적할 때는 힘을 합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선동적으로 무리를 지어 의인들을 대적한다(시 2:1-3). 그러나 의인은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이 전혀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시 64:2)

예수께서 그렇게 무리들에게 잡혀 고난을 당하셨다(마 26:57). 스데반도 군중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행 7:57-59). 사도 바울도 무리들로부터 돌에 맞았다(행 14:19). 언제나 악의 세력은 의의 세력보다 물리적인 힘이 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인 힘이나 그 수(數)에 의하여 세워지지 않는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아주 작고 연약한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진다(눅 13:18-24).



7절, 주석과 해설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다니엘은 이 의논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이 말은 거짓말임에 틀림없다. 또한 관원들 중에는 다니엘을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다(시 116:11, 롬 3:4).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구하면’은 ‘기도하면’의 뜻이다. 즉 다니엘의 원수들은 다니엘의 기도 습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금령을 계획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성격의 조서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아량이 넓기로 이름난 바사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고레스 왕과 같은 사람이라면 그런 조서에 서명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 사람들이 파괴한 여러 나라의 신전을 재건했으며, 그로써 다른 민족들의 종교적 감정과 풍습에 대한 관용의 정신을 나타냈다. 그러나 메대 사람 다리오는 고레스와는 달랐다. 그는 악인들의 참 의도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왕에게 아첨하고 왕을 높임으로써 자기들의 계략을 성공적으로 실행한다. 악한 자의 꾐에 빠지는 것은 대부분 자신을 높이고자 할 때이다. 사탄이 그 정신 때문에 타락하였고, 하와도 마찬가지 이유로 타락하였다(사 14:12-15, 창 3:4-6).



8절, 주석과 해설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이 금령이 정말 심각한 이유는 메대와 바사의 법은 한 번 만들면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더 1:19, 8:8, 라 6:11). 이런 특징은 헬라 저술가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 xvii. 30)는 카리데모스(Charidemos)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다리오 II세의 태도를 묘사하는데, 그는 왕이 사형선고를 내린 후에 큰 오판을 했다고 후회하며 자책했으나 왕의 권위로 행한 것을 돌이킬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 만들면 고칠 수 없는 메대 바사의 법은 마치 하나님의 법을 흉내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사탄이 하나님의 법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법은 멸망시키기 위한 법이요, 하나님의 법은 살리기 위한 법이다.



10절, 주석과 해설


윗방

아람어로 ‘일리’인데, 사람이 방해받지 않기 원할 때 조용히 휴식하는 집의 평평한 지붕 위에 있는 방을 묘사한다. 현대의 옥탑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삿 3:20, 왕상 17:19, 행 10:9). 다니엘은 기도하는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기도하는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을 특권으로 알았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그 내용이 나온다(왕상 8:35, 38, 시 5:7, 28:2).


전에 하던 대로

원수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시하는 줄 알면서도 다니엘은 국무에 충실했으며, 여전히 제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고,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세상이 보든 말든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궤도를 돌고 있는 항성(恒星)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구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은 산봉우리처럼, 다니엘은 인간 세상의 기상(氣象)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전천후(全天候) 인간이었다.

우주의 모든 별들이 제 궤도를 돌고 있고, 한 동안 멈추면 상상할 수도 없는 대 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다니엘의 삶은 변함없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삶이었고, 멈추면 안 되는 자연 법칙과 같은 삶이었다. 변함없이 일정한 움직임이 우주를 유지시키는 것처럼, 이런 변함없는 신앙과 지조의 삶이 사람의 영적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사 26:3-4, 히 13:6-8).


하루 세 번씩

후기 유대인 전승에 따르면, 하루 세 번씩 드리는 기도는 일출부터 계산하여 제3시, 제6시 그리고 제9시에 드렸다고 한다. 제3시와 제9시는 조석의 제사 시간과 일치한다. 시편 기자도 동일한 관습을 따랐다(시 55:17). 매일 세 번씩 드리는 기도는 후일에 랍비 규칙에 따라 사는 모든 정통 유대인의 고정된 관습이 되었다. 매일 세 번 기도하는 이 관습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의 성소 제도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제사를 드렸으며, 이것은 기도 시간과 관계가 있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성경은 여러 가지 기도하는 자세를 언급한다. 다윗은 앉아서 기도하기도 하였다(삼하 7:18).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과 선지자 엘리야는 엎드려서 기도한 기록이 있다(창 24:26, 왕상 18:42). 한나는 서서 기도하였다(삼상 1:26). 그러나 기도할 때 가장 일반적이고, 권장하는 자세는 무릎을 꿇는 자세였던 것으로 보인다(라 9:5, 눅 22:41, 행 7:60).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이 금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니엘은 이런 형편에서 감사할 수 있었을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었다(시 46:1, 34:7).
  • 포로로 끌려올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다니엘을 보호하시고 그에게 나라의 고위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다니엘은 이 땅의 삶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죽어도 사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죽는 것도 주의 뜻이라면 감사하게 생각하였다(롬 14:8).

분명한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상관없이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성공의 비결의 하나였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면 감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삶을 인도하시고 그를 보호하셨지만, 수많은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구원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난을 많이 당하였다(고후 11:24-27). 그러나 그는 이런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음침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도 그는 기뻐하라고 편지하였다(빌 4:4-6, 살전 5:18, 엡 5:20-21).

바울이 이렇게 감사할 수 있었고, 감사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빌 1:20-21). 다니엘도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 기도를 드린 것이 확실하다.

다니엘의 행동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다니엘이 꼭 이렇게 드러내놓고 기도해야 했는가? 숨어서 기도하면 안 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도망가면 안 되는가? 숨어서 예배 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이런 물음에 대하여 단순하게 ‘이것은 맞고 저것은 그르다’라고 할 수 없다. 시대와 문화, 그리고 처한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니엘의 경우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경우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다니엘이 이렇게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습관은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예루살렘의 회복을 구하는 간절한 심경의 표현이었다.
  • 다니엘의 원수들이 다니엘이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내린 법령이기 때문에, 만약 다니엘이 문을 닫고 몰래 기도했다면, 다니엘의 믿음과 함께 하나님도 원수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 그는 어떤 나라나 군주도 개인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 그 음모 뒤에 숨은 실제 목적과 동기는 하나님과 악의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주적인 쟁투와 관련이 있다. 그 당시(기원전 539년)에 다니엘은 이미 다니엘 7장(기원전 553년)과 8장(기원전 551년)에 기록된 환상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왕의 법령이 단순한 인간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적인 전쟁의 한 사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백성에게 나라를 주는 인자에 대한 환상과 그 환상을 해석해 주는 천사의 도움은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도록 그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담대하게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저항했던 친구들의 경험을 되돌아보기도 했을 것이다(단 3장 참고).



11절, 주석과 해설


그 무리들이 모여서 … 발견하고

이 음모를 꾸민 관리들은 누가 다른 신들에게 기도하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니엘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다니엘의 신앙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변함없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금령이 내린다 할지라도 그의 기도 습관은 그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고, 그들은 다니엘을 신뢰하였다.

마지막 대쟁투에서도 사탄은 다른 사람들이 무슨 신을 섬기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남은 무리이다. 그들의 신앙은 확고부동하며 어떤 경우에라도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계 12:17). 그래서 사탄은 그들을 죽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 중의 하나를 사용하는 것이다.



12절, 주석과 해설


왕께 아뢰되

여기서 ‘왕께’는 아람어로 ‘코담 말카’인데, ‘왕 앞에’를 의미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1절에 나오는 ‘하나님 앞에’라는 말은 ‘코담 엘라헤’인데, ‘하나님 앞에’라는 뜻이다. 이 두 말의 비교를 통하여 기록자는,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의 대적들은 왕 앞에 다니엘을 고발하고 있음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왕의 왕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과 세상 왕 앞에서 조아리는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13절, 주석과 해설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이것은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이 “유다에서 사로잡혀 온 자”로 불린 세 번째 경우이다(단 2:25, 단 5:13). 이렇게 언급한 것은 다니엘을 고의적으로 얕보는 것이었고, 그를 좀더 불충성 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니엘의 대적들은 다니엘의 품성이나 인격 또는 능력이 아니라, 그의 출신 성분과 같은 외적인 것으로 그를 평가하고 비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에 있다(삼상 16:7).


존중하지 아니하고

다니엘의 대적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우선 처음에 왕에게 찾아갔을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이 거짓말을 하였다. 총리 중 하나인 다니엘의 동의를 얻지 않았으면서 의논했다고 한 것이다(단 6:7). 또한 다니엘이 의도적으로 왕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다니엘이 이 명령이 내린 후에 기도하는 습관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의 기도 습관은 그 전부터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을 계속한 것뿐이다. 그의 기도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자세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정말 왕을 존중하지 않은 사람은 다니엘이 아니고, 왕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왕이 아끼는 사람을 죽이려고 한 다니엘의 대적들이었다. 다니엘처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이런 습관을 가지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일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일인가!



14절, 주석과 해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왕은 기분이 크게 상하였다. 첫 번째 이유는 왕이 관원들의 꾀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마음이 상한 것은 진정으로 총애하는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니엘을 특별히 좋아하였고, 존경심마저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니엘을 총리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를 극히 고통스럽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시간을 끌면서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았지만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한다.



15절, 주석과 해설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그 운명의 날 다니엘의 원수들이 두 번째로 왕에게 왔을 때는 14절에 의하면 저녁 시간이었다. 여러 시간 동안 그들은 판결이 집행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왕에게 와서 뻔뻔스럽게 그들의 희생물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니엘의 형 집행을 요구할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왕은 빠져나갈 수 있는 도피구가 없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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