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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묵상] 고린도전서 15장 12절-19절, 가장 불쌍한 사람이십니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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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165장, 주님께 영광 새 찬송가 171장,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서론: 부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고요하고 복된 새벽에 하나님의 은혜 보좌 앞으로 한 걸음씩 차근차근 걸어 나오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밤새 영육의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신실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우리를 맞아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남들과의 경쟁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이 새벽만큼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 한 번에 하나씩,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밝은 소망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마음의 무릎을 꿇고  묵상할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은 ' 부활 '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찬란한 보물이자,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깊은 영적 절망을 영원한 소망으로 바꾸어 놓는 위대한 반전의 단어가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본문의 복음 증언을 통해, 부활의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은혜를 전해 주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1. 우리의 절망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직면했던 심각한 영적 위기이자 인간 실존의 어두운 절망감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헬라의 철학적 이성주의와 회의론에 갇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어떻게 육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며 "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의 논리를 격파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 만약 너희 말대로 정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라는 비참한 가정을 세우고, 부활이 없을 때 마주해야 할 영적 절망의 원인들을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선포합니다. 고린도전서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

[6월 24일 묵상] 고린도전서 15장 1절-11절,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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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새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서론: 어두운 새벽을 밝히는 은혜의 빛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이 새벽, 차가운 공기를 뚫고 주님의 제단 앞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어제 하루 여러분의 삶은 어떠셨나요?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조용히 한숨을 쉬며 베개에 머리를 묻지는 않으셨습니까? " 내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잘 살고 있는 걸까? " 하는 자책과 함께,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져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이 자리에 주저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일상은 늘 흔들림의 연속이고, 우리는 매번 자신의 연약함과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와 똑같이, 아니 우리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흔들리고 넘어졌던 인물들이 가득합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짓밟고 믿는 이들을 잡아 가두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해 아주 아프고도 솔직한 고백을 던집니다. 8절을 보면 자신을 "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태중에 온전히 자라지 못하고 칠삭둥이나 팔삭둥이처럼 미숙하게 태어난 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자신은 아무런 자격도 없고 도저히 쓸모없는 상태였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할 때 느끼는 부족함, 무기력함, " 과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용하실까? " 하는 그 깊은 자책감이 바로 바울이 마주했던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자책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오늘 바울의 이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서 흔들리는 우리의 새벽을 어떤 소망으로 채우길 원하시는지 두 가지 믿음의 비밀을 마음에 담기를 바랍니다. 본론 1.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반석 위에 서십시오. 첫째로, 우...

[6월 14일 묵상] 고린도전서 9장 1절-23절, 복음을 위해 내려놓는 자유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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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497장, 주 예수 넓은 사랑 새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갑지요. 눈은 떴는데 마음은 아직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어제 못 푼 문제, 쌓인 피로, 관계의 서운함, 생활비 걱정, 자녀 문제, 건강 염려... 이런 삶의 문제들이 아침부터 마음을 꽉 채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불만들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것까지 해야 하지?” “내 권리도 좀 지키고 싶다.” “나도 힘든데 왜 내가 먼저 내려놔야 하지?” 오늘 바울도 바로 그와 같은 상황 속에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통하여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권리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본문의 핵심은, 복음 앞에서 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바울에게도 권리가 있었습니다. 먹고 마실 권리, 지원받을 권리, 사도로 인정받을 권리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권리를 붙들지 않고, 복음을 위해 모든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장면이 많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오늘 바울은 바로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갑니다. 우리의 연약한 인간적 본성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지만, 그 자유를 사랑으로 쓰기보다 자기중심으로 쓰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편지가 아니라, 우리를 다시 복음 앞으로, 다시 예수님의 마음 앞으로 나아오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쓰여진 편지입니다. 본론 1. 복음은 내 권리를 부정하지 않고, 그 권리를 붙드는 방식을 바꿉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는 권리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권리가 있는데도 쓰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12절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12,...

[5월 22일 묵상] 창세기 45장 16절-28절, 야곱의 영이 소생하였더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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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446장, 주 음성 외에는 새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서론 살다 보면 어떤 소식 하나가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오래 기다리던 전화 한 통, 절망의 끝에서 날아온 편지 한 장. 그 소식이 닿는 순간, 방금 전까지의 나와 그 이후의 나가 달라집니다. 얼굴빛이 바뀌고, 발걸음이 바뀌고, 눈빛이 바뀝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 이상 없습니다"라는 한 마디에 무너지듯 안도했던 순간.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자녀에게서 "엄마, 나 괜찮아요"라는 문자 하나에 주저앉아 울었던 순간. 그 소식이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22년 동안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믿고 살아온 아버지. 그 긴 세월 동안 야곱의 마음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26절을 보면 형제들에게서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의 첫 반응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 야곱의 마음이 어리둥절하였다 "라고 기록합니다. 너무 좋은 소식이어서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보낸 수레들을 보는 순간, 27절 말씀처럼 " 야곱의 영이 소생하였더라 "라고 합니다. 이 새벽,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혹시 오래된 슬픔에 눌려서, 반복되는 실망에 지쳐서, 영이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이 소생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론 1. 기쁜 소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울린다. 먼저 16절을 보십시오. 창세기 45:16,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왔다는 이 소식이, 왜 바로를 기쁘게 했을까요? 바로 입장에서 이것은 그저 신하 한 명의 가족사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바로와 그의 ...

[3월 15일 묵상] 요한복음 12장 44절-50절, 영생을 주시는 참 빛, 예수 그리스도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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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새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서론: 인생의 사각지대에서 들리는 외침 우리는 참 시끄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의 소식, 기름값에 대한 뉴스, 사회 전반의 문제점과 혼란스러운 정치 이야기 등으로 인해, 우리는 어느새 지치고 피곤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이끌려서 그러한 소식들을 찾아 보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정작 우리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놓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바로 우리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무리하시며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공식적인 메시지입니다. 이제 13장부터는 제자들과의 은밀한 다락방 대화로 이어지고, 곧이어 십자가의 길을 가시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 본문은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예수님의 '최후의 통첩' 이자 '가장 뜨거운 사랑의 호소' 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어두운 사각지대에 생명의 빛이 비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본론 1. 간절함의 극치: 외쳐 이르시되 오늘 본문 44절은 아주 인상적인 단어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2: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4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바로 ' 외쳐(ἔκραξεν, 에크락센) '입니다. 이 단어의 원형인 '크라조(κράζω)' 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절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부르짖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는 것' 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로 귀신 들린 자가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기를 갈구할 때, 혹은 맹인이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소리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

[2월 19일 묵상] 요한복음 6장 41절-59절,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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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235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새 찬송가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서론: 풍요 속의 빈곤, 무엇으로 허기를 채우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 주님의 전을 찾으신 여러분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탐식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TV 채널을 돌리면 온통 맛있는 음식을 먹는 '먹방'과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오픈런'을 마다하지 않고, 건강보조식품과 유기농 식단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서점에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 몸에 좋은 음식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몰두하며,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잘 먹고 건강을 챙기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겪는 마음의 병과 영혼의 공허함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육체는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빈약해졌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잃어버렸습니다. 화려한 식탁 앞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증 때문에 우울증과 불안 장애를 호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눈에 보이는 떡, 육신의 양식만으로는 결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이와 똑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육신의 배부름이 너무나 좋아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고, 기적을 더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서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배를 채워줄 '떡'에는 관...

[2월 17일 묵상] 요한복음 6장 16절-29절, '무엇을 할까'보다 '누구를 믿을까'가 더 중요합니다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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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새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서론: '열심히'라는 이름의 굴레를 벗고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어떤 마음으로 나오셨습니까? 우리는 흔히 한국인을 ‘열심의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성실해야 한다”, “남보다 더 많이 해야 성공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직장에서는 성과 지표(KPI) 와 인사 고과 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좋은 부모, 효도하는 자녀가 되기 위해 숨 가쁘게 뛰어다닙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기도 생활을 더 열심히 해야 응답받는다”, “이 정도 봉사는 해야 집사답다”는 식의 ‘ 실적 중심적 신앙 ’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영적 번아웃(Burnout) 을 경험하곤 합니다. “오늘 내가 한 일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시면 어쩌지?” 혹은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왜 내 삶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우리 영혼을 잠식할 때가 많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그들은 하나님께 점수를 따기 위한 ‘해야 할 일들의 목록(To-do list)’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전혀 다른 답을 들려주십니다. 이 새벽, 우리의 분주한 손을 멈추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인생의 풍랑 속에서 '표적'보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가다가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만납니다. 인생의 위기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열심히 노를 저어보지만 제자리걸음일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0절 말씀...

[2월 13일 묵상] 요한복음 5장 1절-15절,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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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새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서론: '로데발'에서 '베데스다'까지 찾아오시는 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데스다' 연못가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묘사하는 베데스다의 풍경은 이름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곳은 자비가 흐르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를 짓밟고 먼저 들어가야만 살 수 있는 ' 무한 경쟁의 현장 '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대할 때면 우리는 구약의 한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사울 왕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 므비보셋 '입니다. 그는 두 발을 다 절며 '로데발'(로드발), 즉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숨어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왕의 식탁에 나갈 자격도, 힘도 없던 그에게 다윗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찾아냅니다. 므비보셋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왕이 베푸는 '언약적 자비(חסד)'를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38년 된 병자 역시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로데발'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므비보셋처럼 스스로 움직일 힘이 없었고, 그를 도와줄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라는 그의 탄식은 오늘날 치열한 세상 속에서 "도와줄 이 하나 없다"고 느끼며 고립된 우리의 고백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이 새벽, 므비보셋을 찾았던 다윗처럼, 절망의 자리에 누워 있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 없음'을 먼저 아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가슴 뭉클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

[1월 7일 묵상] 창세기 4장 1절-26절, 예배의 실패가 삶의 실패가 되지 않으려면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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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새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서론: 비교라는 감옥에서 예배의 자유로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 만연해 있는 가장 아픈 키워드 중 하나는 '상대적 박탈감'입니다. 최근 한 사회심리 연구 통계에 따르면, 성인의 약 64.1%가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타인의 일상을 확인한 후 자신과 비교하며 우울감이나 자존감 저하를 경험한다고 답했습니다. 타인이 누리는 축복이 곧 나의 결핍으로 느껴지는 이 '비교 증후군'은 현대인의 영혼을 갉아먹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이러한 비교와 시기의 비극은 성경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몰락입니다. 사무엘상 18장에서 여인들이 "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고 노래할 때, 사울의 마음에는 깊은 시기심이 싹텄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인과의 비교에 매몰되어 결국 평생을 다윗을 죽이는 데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예배자가 하나님이 아닌 '남의 시선'과 '내 몫의 크기'에 집중할 때, 그 마음은 지옥이 됩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의 가인 또한 이 통계적 수치와 사울의 비극을 선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은 밖이 아닌 '예배의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동생의 제물은 상달되고 자신의 것은 거절당했다는 그 비교의 마음이 그를 살인자로 몰아갔습니다. 이 새벽,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보다 앞서가는 누군가를 곁눈질하며 분노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참된 예배의 태도와 인생의 방향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예배의 성패는 제물이 아닌 '예배자의 중심'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두 형제가 드리는 예배를 구별하셨습니...

역대상 25장 1절-31절, 당신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 매일성경 큐티 새벽예배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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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주의와 끊임없는 경쟁에 지친 영혼을 위한 벽예배설교입니다. 6월 25일 매일성경 큐티 본문인 역대상 25장 1절-31절을 통해, 내 힘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불안의 소음을 끄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은혜의 노래를 통해 참된 쉼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당신의 삶이 고된 독주에서 기쁨의 찬양으로 변화되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하고,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십시오. 역대상 25장 1절-31절, 당신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410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새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서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종종 쉼 없는 오디션 무대와 같아 보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오늘도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의 막이 오릅니다. 30대는 유능한 직원과 좋은 부모라는 역할을 완벽히 해내려 애쓰고, 50대는 쌓아온 성취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 분투하며, 70대는 남겨진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찾고자 합니다. 이 무대 위에서 우리는 모두 ‘성과’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그 노래의 배경에는 ‘이만하면 됐을까?’ 하는 불안의 소음과 ‘혹시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경쟁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소란스러운 자기 증명의 노래에 지쳐, 영혼의 깊은 안식을 주는 다른 노래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본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의 이 긴 이름들의 목록은, 바로 그 다른 노래,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삶의 아름다운 악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청사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삶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1. 세상의 노래를 끄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에게 부르라고 강요하는 노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노래라는 점입니다. 나의 성공, 나의 만족을 위한 이 노래는 필연적으로 경쟁과 고립을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듣기 원하시는 노래는 그 목적과 질서가 ...